정독도서관에는 벚꽃이 끝없이 날리고 있었다. 아름다워서 자꾸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바닥을 보아도 수북히, 가볍게 옮겨 다니는 벚꽃이 있어 황홀했다. 이런 풍경에 한 시간이도 두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팥죽도 한 그릇 먹었다. 여전히 그 단맛이 몸에 있는 것 같다. 저녁에는 영화를 보러 갔지, 을 보고 울다가 웃다가 하고 나왔다. 캐릭터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이야기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극중의 가부장 대원에게는 이렇다할 목소리가 없다. 그의 심경도 나오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모양 나쁘게 도망다니다가 어수룩하게 당한다. 그 자리에 가득 차는 주조연들의 목소리. 정말 좋은 날이었어. 이 얘기를 하려고 오랜만에 들어왔다. 스투키 두 개를 화분에 옮겨 심었다. 다음 주에는 ..
아주 오랜만에 흰색 창을 마주하고 앉았다. 삼십 분쯤 그냥 있었나. 삼십 분쯤 그냥 있는 일로부터 쓰기가 시작되려나. 삼십 분이 다 지났다. 저녁 대신 산미구엘을 먹는 사람이 되었다. 말하자면 기린이 더 좋은데, 가끔 행사 상품에서 빠진다. 수영에서 돌아오는 날 늦은 장을 보는데, 두부 아니면 두부이다. 작은 마트에는 맛있는 두부와 맛없는 두부가 있는데 그제는 맛있는 두부가 들어와 있어 사왔다. 하나를 반으로 나눠서 부쳐 먹는다. 두부를 먹는 일은 행복하고, 다 먹기에는 더 없이 배가 부르다. 삼등 분을 하기에는 냉장고를 버티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 다음날도 벌처럼 흰 두부를 잘라 후추를 뿌리고 계란을 풀어 부쳐 먹는다. 오리발 수영을 제일 좋아해 월요일을 내심 기다리면서, 일요일 저녁부터 오리발을 챙..
를 읽었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에 수록되어 있다. 대상은 . 읽다가 말았고 에서를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네 번도 읽을 것 같고, 다섯 번도 가능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만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글은 최소한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2030대의 고립, 화남, 두려움, 연민, 그리고 사랑에 비슷한 감정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닿아있다. 단지 글일 뿐인데도, 이국의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온 것 같다. 오늘도 말이 없는 얼굴로 상대방의 눈을 거의 보지 않은 채로. 제일 힘들다는 것처럼, 무능력함이 지겹다는 말을 말이 아닌 걸음걸이로 보여준 사람이라면 에서 하민의 얼굴을 대번에 그려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지만, 그곳에서는 누군가 물어올 이..
이름이 있었는데, 잊어버렸다. 한 오 년 동안 본 적이 손에 꼽기 때문이었다. 폐차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제 떠났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차였는데 미안할 정도로 곁에 오래 있어주었다. 이야기는 십 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차에 관해 이야기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있지. 그 차가, 이제 없어. 그 차는 세탁소 건물 근처에 자주 서 있었다. 나는 그 건물의 4층에 살았다. 차에 대한 가장 최근의 기억이다. 차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나갈 수 있었다. 강변에 차를 세워두고, 다리를 건넜다.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파트의 불빛이 총총총 박힌 저녁의 강. 한 바퀴를 돌다가 오면 차는 그 자리에 있었다. 가자고 하면 아무데나 가주었다. 정말 쉬운 일이었다. ..
그 애 생각으로 하루 종일 걸을 수도 있다. 그 애 생각만으로 온종일 일을 하고 그 생각만으로 수영을 하고 밥을 먹는다. 까뮈 생각으로 가득하고 따뜻하다. 까뮈는 태어난지 8개월령의 아이로, 흰 털은 점점 더 하얘지고 검은털은 점점 더 검어지는 아주 잘생긴 고양이이다. 우리집에는 아주 애기일 적에, 2개월이 채 못되었을 때 왔다. 먼지를 뭉쳐 놓은 것처럼 생겨서는 주먹 두 개 만한 크기로 뽈뽈 거리며 한 방에만 있었다. 지금은 4키로가 넘어, 제법 묵직해서는 온 집안을 뛰어다닌다. 까뮈는 숨바꼭질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좋아한다. 우리는 몸의 크기가 서로 달라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 잘 못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사각을 알고 있다. 사각에 솜털 같은 얼굴보다 유리구슬 같은 눈이 먼저 보일 때, ..
IM 4세트! 접영-배영-평영-자유영 4세트를 하는데, 출발은 한 팔 접영으로 하는 거였다. 이것은 끝나지 않았고, 바퀴 세는 것은 진작에 잊었고, 앞사람 가는 대로 가고 있었다. 점점 힘은 빠져가고, 호흡은 엉망이고, 어떻게 다시 출발선으로 와서 재정비를 해도 진창으로 돌아왔다. 몇 세트를 했는지 모르겠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출발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수영선생님은 마지막 사람까지 들어오자, 둥글게 모아 놓고 바깥에는 알릴 수 없는 기밀이 있다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허리를 숙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빠르게 어떤 화면이 스쳐갔다. 경기 중인 선수들처럼, 이겨야 하는 상대가 있는 것처럼, 이 수영장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자, 우리 10분만 버티면 됩니다..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자신이 나를 환대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날 그는 내 손의 금반지를 보고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었으리라. "금반지에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금이 없다면 '구멍'(그렇다면 구멍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으리라)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금은 구멍이 없더라도 존재한다) 또한 반지가 아니다. [....] 구멍이란 그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금에 힘입어서만 (어떤 부재의 현전으로서) 존재하는 무無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행동인데, 이러한 인간은 그가 '부정하는' 존재에 힘입어서 존재 속에서 무화하는 그러한 무일 수 있으리라" _에서 나온 문장, 의 92p 주. 어떤 부재의 현전으로서. 존재하는 무. 컵을 쥔 손을 자..
오랜만에 다시 시작.다섯 줄부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한겨레출판/ 2018접어 놓고 싶은 문장이 한 줄도 없다(그것이 이 책에 대한 나의 슬픔이다) 제목과 표지만 남을 만하다. 얕게 시작해서 좋게 끝나기 급급한 글들. 문학에 순교한 자신의 처연함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치장하는 처절하게 단 문장들. 편집은 장을 나누는 것도, 글을 분류해 내는 것도 모두 실패했다. 수 년의 시간이 겹치는 글은 고르지 않고, 사유는 물을 다행히 건너가게 된 물수제비 같다. 흥미로운 부분은 작가가 책을 내면서 새롭게 쓴 서문 뿐이다. 그는 젊었을 적, 자신의 치기로 탄생한 책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전의 책은 재미라도 있었지. 저지대헤르타 뮐러/ 김인순/ 문학동네/ 2010작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리커버로 나와서..
제목에 중요한 단어가 빠져있다. 바로 . 거기에 '양육자'를 추가한다. 그래서 이 책에 가장 알맞은 제목은 는 어떻게 돼? 이다. 자유롭게 아이들을 방임 양육하고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준다는 이야기를 주 양육자인 '여성, 어머니'를 살뜰히 제거하며 진행한다. 이런 이야기에도 남자가 발언권을 쥔다(아니 쥐어준다). 아이를 4명을 키우는데, 그것도 한국 남자가 일본에서, 라는 이유가 특이점이 되는가? 이런 것을 특이하다거나, 시사점이 있다고 치켜세우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대단한 시선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한국계 미국인이 있다. 그(녀)의 이력도 하나도 모르면서, 미국에서 갑자기 유력한 인사로 떠오를 때, 국내의 언론이 갑자기 그를 '한국인'으로 호명해 기꺼워하는 행태와 비슷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잘 있어 이상협 모르던 때, 살던 집 없고 그 터엔 공기가 자랄 때 밥을먹지 않고도 나는 있을 때 시점 없이 하늘을 바라볼 때 색을 모를 때 인간을 모를 때 나는 다 모르고 흩어져 웃고있을 때 손 없이 꽃을 줍고 예감으로 위치에 정확히 설 줄알 때 남자도 여자도 아니어서 아름다움이 일 때 시간을 다 트고도 시간이 남을 때 신을 소실점에 몰아넣고 종교가없을 때 모여 있고 싶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지구는 감정의 뭉치 무한한 흰빛 속인 듯 무엇이든 하얗게만 하얗게있을 때 이렇게 내가 잘 없을 때 중에서 길고양이가 쓴 시 "예감으로 정확히 설 줄 알 때" 이런 말 너무 좋지. 아마 여기 때문에 접어 놓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길고양이 이야기인 것도 같지. 길고양이가 하늘을 바라볼 때, 색을 모를 때,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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