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포니 임유영 방과후 문예반에서 소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소녀들은 또래보다 빨리 읽는다. 소녀들은 하나의 문장을시작하고 끝낼 줄 안다. 여러 개의 문장을 잇고 쓸데 없는 문장을 뺄 줄 안다. 소녀들은 이야기를 빈틈없이 전개한다. 곁으로 새는 법 없이 기승전결의 구성을 만든다. 소녀들은 쓴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맞이하는 청소년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의 성폭력 방지 대책을 제시하고 광복을 기념한다. 조국의 통일을염원하거나 반대한다. 선조들의 기상을 찬미하고 독립 열사를 추모한다. 소녀들은 어제 옆집 아저씨가 엄마한테 시비 거는 광경을 보았고 소녀들은 요새 친구들과 은근히 멀어진 것 같다고 느낀다. 소녀들은 교실에서 쓰고, 때가 되면 야외에 나가서 쓴다..
불우한 악기 허수경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초라한 남녀는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왕릉 어느 한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젖은 알몸들이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 붙어 무너지다가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왕릉 너머 어디 먼 데를 먼저 가서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또 좀 불우해서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낸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어디 먼 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시인은 어디까지 보고 어디를 다녀오는 걸까. 시를 하나 읽었을 뿐인데 책에..
시인의 말 어떻게들 지내시나요? 지난 주말 저는 차게 식힌 멸치다시다육수에 삶은 소면을 적셔 먹으며 라는 시를 썼습니다. 고향에서 푸성귀를 가꾸며 사는 부모를 떠올리며 아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감실감실 꿈이 참 길었습니다. 깨는 건 한순간. 누구에게나 좋은 시절이 있다고 믿으면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아양을 떨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에게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개를 아끼고.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벌하며 살다가도 누군가 먼저 떠나면 크게 울고 만다는 사실이 이 시집에는 담겨 있습니다. 잘들 쓸쓸하세요. 2020년 여름, 빛 김현 긴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음, 별로를 빼고 말해도 참이다. 좋아하지 않는다. 김현의 시는 대부분이 길었다. 나는 두 쪽을 넘어가는 시를 좋아하지..
투명한 집 정재율 얼음 속에는 단단한 벽이 있어 나는 그 너머로 집 한 채를 볼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고 싶다 자꾸 무너지는데도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아이처럼 인기척이 느껴지면 사라지는 벌레처럼 주머니엔 사탕 봉지가 가득하다 끝이 닳아 버린 운동화와 홈이 맞지 않는 문턱들 그 아이의 사정은 모두가 알았다 커튼을 쳐도 들어오는 빛처럼 아이가 아픈 이유는 집에 큰 어른이 없기 때문이라고 얼음을 탈탈 털어 먹으며 이야기하는 이웃들 아이는 나뭇잎을 주워 주머니 속에 구겨 넣는다 외투 밖으로 삐져나온 소매를 안으로 넣으면서 슬픔이 뭔지도 모르고 그새 자라 있다 창문이 깨지는 순간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과 비슷하고 아이가 바깥으로 밀려난다 영혼이 그곳에 있는데 귓속에서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유리알 파편처럼 ..
정말 정말 좋았다 김소연 갑자기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다 연료가 떨어진 낡은 자동차처럼 너는 다음 소절을 우렁차게 이어갔다 행군하듯 씩씩하게 걸었을 거다 같은 노래를 하면 같은 입모양을 갖는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길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같은 말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 "와, 보름달이다!" 와 같은 모퉁이를 돌아도 꿈이 휘지 않는다는 착각을 나누어 가진다 땀을 뻘뻘 흘리는 눈사람에게 장갑을 끼워줄 수도 있다 장갑차에게 꽃을 꽂아주듯이 가로등이 소등된다 우리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저 모퉁이만 돌면 우리, 유령이 되자 담벼락에 기댄 쓰레기봉투에서 도마뱀이 꽃을 물고 기어나오듯이 숨어 있는 것들만 믿기로 한다 병풍 뒤에 숨겨진 시신처럼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이 된다 정말 정말 좋았다 , 2013 ----- 가장 좋은 ..

여름 -민구 여름을 그리려면 종이가 필요해 종이는 물에 녹지 않아야 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크거나 훨씬 작을 수도 있다 너무 큰 해변은 완성되지 않는다 너무 아름다운 해변은 액자에 걸면 가져가버린다 당신이 조금 느리고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 남은 검은색 파스텔로 아무도 오지 않는 바다를 그리자 당신의 여름이 기분이거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여행지라면 시원한 문장을 골라서 글로 쓸 수 있는데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좋겠다 파도가 치고 있다 누군가는 고래를 보았다며 사진을 찍거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겠지만 고래는 너무 커서 밑그림을 그릴 수 없고 모래는 너무 작아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두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이 오면..
슬픔은 이제 유병록 아무렇지 않은 척 고요해진 척 회사에서는 손인 척 일하지 술자리에서는 입인 척 웃고 떠들지 거리에서는 평범한 발인 척 걷지 슬픔을 들킨다면 사람들은 곤란해할 거야 나는 부끄러워질 거야 네가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흔들지 몸속 깊숙한 곳으로 밀어두지 구덩이 속에서 너는 울고 있겠지만 내가 나에게 슬픔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모르는 척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 때까지 괜찮아진 척 시집 중에서(2020. 10월 출간, 창비) -------------------------- 아주 오랜만에 읽은 시. '사람들은 곤란해할 거야 나는 부끄러워질 거야'부분에서 '거야'앞에 띄어쓰기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엄청 크게 보였다. 그 한 칸에 곧 곤란해해지거나 부끄러워질 시간이 충분히 있다는 것처럼. ..
내가 시인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으면 좋겠 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영상 다큐멘터리 감독이 우리 둘의 일생을 촬영했으면 좋겠다 둘의 철학은 구별된다 너는 나의 태도를 나는 너의 생활을 사랑한다 너와 나는 지옥이 무엇인지에 대해 종종 의견을 나눈다 지옥은 내 가 아직 겪어보지 않은 곳이다 내 관점이고 지옥은 이미 겪은 괴로움을 겪는 곳이다 네 관점이다 내가 맞다 내가 지옥에 가면 나는 거기가 지옥이 아니라고 할 것이고 네 가 옆에 있다면 너는 여기가 지옥이 맞다고 할 것이다 아 니야 여기보다 더 괴로운 데가 있을 거야 너는 지옥에서 도 내 해석을 좋아해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둘 중 하나가 병에 걸려 먼저 죽으면 다큐멘터리 감독 이 편집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은근슬쩍 한쪽 편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
폭염 정한아 도서관 뒤뜰엔 잊혀진 사상처럼이끼가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사람들은 소태를 얼마나 오래 머금을 수 있는지 붓꽃과 익어가는 여주와 박꽃과 봉숭아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결코도달할 수 없는눈으로만 먹을 수 있는빛깔들맛을 보면 도망할 육식동물들을 위해고통 없는 선을 위해아름다운 착한 것이 있어야 할 텐데 어쩌나, 가물어 단과일을 크게 베어 물면소리 없이 가능한 한 멀리 내어 뱉는씨앗 같은 문장부호들 왜, 죽음의 징후-꽃들은절박할 때만 피나, 왜,아름다운 채 삼키면 치명적인가, 왜,도서관 뒤뜰엔 아직도 잊혀진 사상이, 웬 조그만 노인이, 우산이끼처럼 까라져아직 파란 여주를 씹고 있나 신기하게도 이 장면에서 '여주'말고 다른 과일은 생각하기 어렵다. 여주가 무엇인지 찾아보아도 알기 어렵다. 여주가 어떤 ..
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 의 처음과 끝 사 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 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면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 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인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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