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 할 일들 안주철 아내가 운다.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다음 생에는 집을 한채 살 수 있을 거야.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아내는 피식 웃는다.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아내는 밥을 차리고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
우리 약국 갈까 임승유 소풍이라도 가자는 것처럼 말하니까 호루가기가 생각났다 호루라기를 부니까 노을이번지기 시작했다 피가 돌기 시작했다 손끝까지 가서불끈 쥔 주먹이 될 거야 숨이 턱까지 차오를 거야 핀셋으로 아스파라거스를 뽑아냈다 목에 걸린 달리아가 호루라기는 고여 있다고 말한다 하늘이 텅 비었다고 말한다 지렁이도 질병사를 할까 귀뚜라미는 구름은 더 작아지고 싶다면 약국에 가는 거다 약국은 알약들의 세계 분말들의 세계 목구멍의 세계 의자처럼 창백하다는 건 뭘까 에 대답하기 위해 우린 약국에 가고 있었던 거잖아 오렌지가 먹고 싶었다면 소풍을 가자고 하지 그랬 니 대관람차를 탄 것처럼 피로하구나 오렌지가 먹고싶었다면오늘 아침의 신발 정리와 수첩과 물병을 다 합쳐 오렌지가 먹고 싶었다면 우리 소풍 갈까 그렇게..
풍속 황인찬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부자의 아내 창밖으로는 삶이 부서지지 않는 풍경이 펼쳐져 있고, 복도에 울려 펴지는 내아이의 이름이 있는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너의 사촌 형 일 년에 한 번, 머나먼 시골집에서 너를 만나고, 두 사람의 비밀은 죽을 때까지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뒷산의 돌무덤 아름다운 세계가자꾸 이곳에 있고, 항상 까닭 모를 분노에 시달리던 어린시절도 다 지나갔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내가 되고 싶었던 것 하지 말아햐 할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 눈을 뜨면 아침이 오고, 익숙한 한기가 발밑을 맴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지만 열지 않았다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9
가시를 위하여 김선재 통증을 용서해요 부분이면서 어느덧 전체가 된 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 날을 세운 날은 아니지만 나면서 당신이고, 당신이지만 나인 시간을 견뎌요 나는 기원에서 멀어졌다 이미 나는 숲의 변형이며 혹은 바다의 변종이다 형식에서 멀어져 속도 없고 겉도 없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라진내용이지만, 여전히 전체를 제압한다 형식을 제압한다 나는 혀의 어순이다 돌기들 사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하나의 돌기는 혀일까 바늘일까 미각은 우리의옛 성질이었으나 지금 너는, 나는 혀인지 바늘인지,짠맛인지 쓴맛인지 수시로 아픔을 확인하는 너인지나인지 같은 온도를 갖기 이전에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러니 제 분을 못 이긴 팔매질을 용서해요 때로 실감의 모서..
키스의 시작 김중일 두사람 지평선 왼쪽 맨 가장자리에서 공기로 빚은 얼굴만 한 빵을 한입씩 나누어 베어 물듯 고요하게 왼쪽 맨 가장자리가 지구 한바퀴 돌아 오른쪽 맨 가장자리를 따라잡기까지 순식간에 실업한 두사람 발치에 떨어진 풍선을 몰래 들듯 가만히 두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들고 온몸 부풀어 떠오르도록입 맞대고 서로를 숨처럼 서로에게 불어넣고 어느새 달아오른 살갗 주름진 표정을 뒤집어쓴 두사람 온몸을 서로에게 구겨넣고 이제 멀리 떠나버리려는 듯마지막으로 키스하는 두사람 서로의 몸속에 각자 온몸을 다 쏟아붓자 사라진 두사람 눈앞에서 남은 건 한주먹의 투명한 적막뿐 적막을 걷고 맨 앞으로 등장하는 두사람 숨소리로 빚은 얼굴만 한 빵을 한입씩 베어 먹듯 막 키스를 시작하는 두사람 김중일, 『내가 살아갈 사람..
피의 종류 이장욱 오늘의 햇빛은 감정을 지우는 데 쓸모가 있다.공공장소에는 비둘기들이 어울려.새들에게도 혈액형이 있고그들만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사람들은 꾸준히 거짓말을 하며 걸어다녀.누군가는 매일 혈액형이 바뀌고누군가는 피의 종류를 모르지만아이들은 열심히 새로운 습관을 만들었네.오늘의 날씨는 쉽게 솔직해져.갑자기 쏟아지는 빗방울들이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듯이.길가에 납작해진 비둘기가 조금씩길이 되어가듯이.약국 셔터 아래로 신문들이 쌓이고피를 뽑은 후에 사람들은가벼워진 몸으로 다시어제의 거짓말을 시작했다.공공장소에서는 누구나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되고피의 종류에 대해해박해지고 이장욱, 『생년월일』, 창비, 2011.
해삼내장젓갈 최정례 해삼은 이 집 주방이 두렵다. 칼이 무섭고 도마도 무섭다.건드리면 지레 겁먹고 얼른 뭔가를 내놓는다. 한줄뿐인 내장에 이상한 향을 품었다가 위험이 닥쳐오면 재빨리 내장을 쏟아놓는다. 창자만 가져가시고 몸은 살려달라는 최후의 협상 카드를 내미는 것인데, 인간 세상 협상 대신 내장빼앗고 해감 반으로 잘라 양식장에 던져놓는다. 나도 당신이 두렵다. 두려움과 그리움을 구별할 수가 없다.어젯밤 당신 내게 왜 그런 소포를 부쳐왔는가. 우편물이 왔다고 해서 문을 열었는데 거기 묶인 꾸러미 위에 희미하게당신 이름 적혀 있었다. 당신이 내게 뭘 보낼 리 없는데, 어떻게 내 주소는 알게 됐을까 풀어보려는 순간, 이름 희미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대개 꿈 아니면 백일몽이다. 두려움과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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