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궁리에서도 알기 어려운 것들은 대개 시간이 만드는 고통과 관련있다. 그때가 돼봐야 진심으로 알 수 있으며, 지금은 조금도 상관 없다는 것처럼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예컨대 할머니가 KFC에서 닭 사는 방법 같은 것 말이다. 이 평범한 장면에서 나는 무척 고통스러웠다. 사실 장면은 아주 상투적인 구성이다. 애들이 좋아하는 닭을 사면서 미군부대의 젊은, 흑인 혼혈 군인을 만나야 했고, 소영(윤여정)이 그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장치처럼 마련된 에피소드였으니까. 이 짧은 사이, 쩔쩔매는 주문을 하는 할머니가 내가 되는 것을 보았다. 하프로 사야할지 점보로 사야할지, 요만한 아이랑 먹으려면 어떤 사이즈가 좋은지 모른다. 할머니가 된 나는 언젠가의, 여러명의 나와 함께 있다. 이 닭을 집에서 기다릴 어릴 적의..
이 세상에서 몰래 나와 언제나 머물고 싶었던 방, 우리만으로 전부였던 공간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얼마나 눈빛으로 가득했는지. 그곳은 틀림없이 중심에서부터 한없이 커지는 원이었다. 언제나 풍족했으며,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곳은 어떻게 해도 원의 끄트머리, 그믐의 달처럼 '겨우' 빛날 수 있었던 공간임을 알게 된다. 아델과 엠마는 여기, 서로가 작게 교차했던 곳을 우주처럼 여기며 뛰어들었다.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터널인 듯 황홀했지만, 우리가 교차할 수 있던 지점은 나의 아주 일부일 뿐이란 걸 알게 되었을때, 각자가 가진 원의 중심이 다른 곳을 향해 미끄러질 때, 우리의 작은 방은, 사랑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너는 어떻게 걸을 수 있겠는가를 말한다. 아델이 온몸으로 말한다. 이 둘이 ..
술하면 아버지술은 예전 아버지들이 마셨다. 물론 아직도 마시고 계시고. 바깥의 일이 힘들어서 집에 와 술을 드신다. 1. 골병 드시는 아버지. 2. 분노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집안의 것을 부시고... 비극으로. 3. 아침이 밝으면 잘못했다고 빌고는 아버지, 4. 혹은 뻔뻔하게 집을 다시 나서는 아버지. 5. 집 밖으로도 나가지 않는 아버지.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술은 왜 아버지만 드시나. 아버지만 힘들었나. 다른 이들은 아버지의 힘듦으로 과연 살만했나. 아니 아니 아니,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 뿐이었던 것은 아닐까. '여자'라는 개인이 마시는 술이곳은 2010년도 이미 중반, 에서 요양원을 며칠씩 탈주해 술을 마시는 영경의 알콜 중독 증상은 자해에 가깝다. 자해는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이..
그럴 땐 이 노래를 초콜릿처럼 꺼내 먹어요 자이언티, 내일, 미래, 10년 후... 이런 말들 앞에서 주춤합니다. 이런 시간의 지칭은 2사분면으로 뻗어나가는 그래프처럼 언제나 조금 더 성장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는 건, 이 세상의 조금 더 큰 단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아닐까? 나이를 먹는 것의 이유는. 그러나 나는 피곤이라는 단어를 알기 위해서 지금 나이를 맞는 것 같습니다.분기(세상에, '분기'라고 이야기하는 작태를 보십시오) 지날수록 극명하게 알아가는 것은 '피로'뿐 인것 같습니다. 모든 성취, 환호, 우려, 실망보다 먼저 오는 것은 다름 아닌 피로인 겁니다. 대단한 피로였어. 다시 없을 피로였어, 지루한 피로야. 오늘 피로 한잔 어때? 알..
나는-너에게-편지를-써 우리가 '나는'을 발음하고 '너'를 이야기 할 때가 되면, 처음 시작했던 말 '나는'은 사라진다. 우리의 입은 하나이고 단 하나의 발음을 한 순간에만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차례대로 발화된다. 너에게 '나는'을 이야기 하기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너에게 '나는'을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사랑해'라는 말이 밀려오는데, 너는 '사랑해'까지 듣지 못한다. 언제나 '너는'을 이야기 하기 위해 '나'를 먼저 시작했는데, 너는 그저 '나'만을 듣는다, 듣지 않는다...너는 언제까지 거기 있어 나 이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네 앞에서 있어 이 말을 끝까지 할 수 있을까. 한꺼번에 이야기 할..
우리의 피로는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곳에는 사람보다 나무가 더 많고, 숲 이면에는 이제는 보일일 없는 오래된 제사가 있다. 사람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선정릉은 특별한 날 외에는 사람을 초대하지 않는 죽은 자의 집이다. 신도와 어도가 명령하는 산 이와 죽은 이의 길 다름은, 막연하지만 앞으로의 ‘나’와 두운이 가진 삶-차를 보여준다. 그러나 프랑스어과를 나와 에펠탑이나 빵이나, 파리 8대학 같은 것을 생각했떤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떤가. 이것은 두운과 ‘나’ 못지않게 넘을 수 없는 낙차다. 정확하고 묵직한 훅을 날리는 두운, 나무의 이름을 정확하게 읊는 두운, 생각이 있긴 있는 것일까? 묻고 싶은 두운. 열거한 범상치 않은 모습은 두운이 스스로 자각할수 없는 그의 가능성인데, 이것은 ‘내..
'그 책'은 4~5페이지마다 접혀 아래쪽이 뚱뚱했다. 잘 말린 식물처럼 아래가 벌어졌다. 그녀는 그 책을 매번 읽을 것도 아니면서 늘 가방에 챙겼다. 때문에 표지에는 이런저런 상처가 생겼고, 그녀는 일과처럼 자신의 일이 끝나고 나서야 그 책을 가방에서 꺼내 주었다. 하루종일 가방에서 고통스러웠을 그 책. 차르르, 아코디언처럼 벌어졌다. "누나는 참 책을 소중히 다루네요." 언젠가 무슨 책, 500페이지가 넘는 양장책을 빌려주며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다른이에게 책을 빌려주기 전에 종이로 책을 포장했던 건 그 책을 아껴서가 아니라 빌려간 사람이 '은연중'을 만들며 생기는 표지의 흔적 때문이라는 게 생각났다. 의도하지 않은 상처, 시간을 함께 빌려주는 것,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자연 수렴.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우연한 만남을 ‘관계’로 키우는 장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떤 순간이 들어있다. 나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우연’에 그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감동스러운 장면이지만, 이 순간은 벼락처럼 오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 흔하게는 내가 이렇게 걷고, 먹고, 사람과 만나고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사건’까지 필요하다. 겐타로는 고등학교 입학식 날 사고를 당한다. 사고야 가벼웠지만 당장에 자전거를 타고 가지 못하게 되었다. 늘 가던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걸어야 했고, 걸었기 때문에 상자에 담긴 강아지를 발견하게 된다. '잘 키워달라'는 쪽지를 알 도리가 없는, 아주 작은 강아지였다. 책은 이 작은 강아지의 귀여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뛰었다거나 잘 잤다거나 먹는다는 이야기..
"가끔씩 이야기는 무너지고," * 목차는 반원으로 배치돼 있다. 활대 보이지 않는 시위가 팽팽하고. 작가의 손은 목차의 중간을 당겼겠다. 그래서 가장 가운데 솟아난 '매듭'부분을 읽어야 하겠지만, 첫 번째 실린 '살구'로 이미 마음이 어지럽다. 여기까지 쓰니, '매듭'을 중심으로 목차가 대구를 이루고 이루는 게 보인다. 시작은 '살구'고, 끝 역시 '살구'다. 솔닛은 '당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묻다가 "종종 이야기가 당신의 무릎 앞에 떨어진다."며 잠깐 상념에 잠기게 한다. 그런 적이 있던가, 있지, 기지, 그렇지 싶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100파운드의 살구 더미가 도착한 적 있다며 너스레다. 무슨 얘긴가 살펴보니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살구였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살구는 무척 달..
귀애하는 것을 거리두는 일에 대해 무엇이 되기 전에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음가'로 수 놓는 시가 있다. 때문에 의미가 나중에야 오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사방에서 보고 되뇌인 후에야 쓰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끼는 것을 대할 때 간신히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안감힘이 있는지. 다행히 둘 수 있는 그 짧은 곳을 '거리'라고 하자. '거리' 두고 싶은 시. 이 의미를 안다는 듯 저자는 초엽에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를 놓았다. 햇빛을 길게 읽는다. 그것이 어딘가를 통과하는 '긴 장소'는 어떤 것일까. 햇빛의 혼잣말을 알아듣는다불투명한 분홍 창이내 손 일부이기 때문이다(중략)이토록 섬세한 공소(空所)의 햇빛이 키우고,분홍 스테인드글라스가 가꾸는,인동초 지문이 손가락뼈의 고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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