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지도 이병률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을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
사랑의 (무거운) 신호 이병률 채팅하다 대뜸 전화번호를 묻는 한 여자아이 전화 걸어같이 살 수 있냐고 묻는다 밥하고 빨래해주고 그러겠다 한다 나는 미친사람처럼 웃는다 사랑해라고 다섯 번 말해달라 한다 얼굴도 보지 않은 아이 상관없어요 분명 아저씨가날 사랑할 거니깐 나도 아저씨를 사랑할 수 있어요 그건일도 아니예요 창 밖에는 가랑비 내리고 문득 한낮이라는 사실이 무겁고 아프다 비를 피한 매미 담벼락 어딘가에 붙어 슬핏슬핏우는 소리 들리고 눅눅한 마음에 달라붙은 벌레 몇 마리를 집어 재떨이에 옮긴다 아저씨 변태 아니죠 여기는 보수적인 데라 아저씨랑 팔짱끼고 다닐 수가 없어요 아저씨 나한테 뭐 해줄 건데요 같이 한 방 사는 친구들이랑 수영하러 갈 거라는 여자아이 묻지도 않았는데 재잘재잘 새처럼소리 높여 술장사..
[내 인생 마지막 편지](47) 이병률 - 나의 시에게, 허수경 시인에게 : 원문 경향일보 나는 지금 막 시에게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습니다. 시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마음 한쪽 편이 가득 채워지는 건 먼 곳에 있는 한 시인의 존재 덕분입니다. 이 편지는 그리하여 독일에 있는 당신에게 도착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시에게 당부할 것이 있었고, 야단칠 것이 있어서 같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다음 같이, 다시, 태어나자는 편지를 쓸 참이었습니다. 선배 생각이 달려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시를 생각하면 그리 되었습니다. 불편하게 당신을 시로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시 이야기를 물어봐준 사람이 당신이고, 내 시를 고백한 사람이 당신뿐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여 나의 모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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