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냉장고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서였어. 돌아가자면 갈 수 있었지만, 이미 한 번 다녀온 후라서 냉장고 닫힌 느낌을 재차, 재차 떠올려 보았어. 문이 잘 안닫혀서 물을 꺼내고 다시 자리를 잡아 넣었던 참이었어. 자석의 당김, 냉장고와 문이 닫히는 자력이 분명히 손에 느꼈던 것 같아. 다시 버스를 기다렸어. 물을 한 모금 마셨어. 아침은 쿠키였고. 쿠키는 바스락 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어. 정류장은 지나치게 밝고 부슬부슬해. 너는 새벽같이 나갔어. 아까 돌아 갔다 온 건 현관 앞에 놓여 있던 택배 상자 때문이었어. 있던 대로 두었다가 이만치 걸어 나온 참이었는데 눈에 밟혔던 거야. 버리고 올 걸 그랬나. 보통의 박스를 대하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보통은 버리는 것이 맞겠지...
반지를 빼놨다. 잠깐이고,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다. 내년과 내후년, 그리고 그 이후로의 시간은 거짓말도 못하고 백지다. 너덜거린다. 올해는 유난하다. 찢어버릴 용기는 없지만 지금은 그저 그 밑에 수두룩한 크레파스는 치워야 한다. 는 마음이다. 그러나 과연 치울(수 있을) 것인가. 색색을 집고서는 크레파스에 대한 생각으로 한 달 한 달을 보내지 않으려나. 크레파스의 냄새와 두껍게 발려도 깊어지지 않는 색깔과. 그러나 부러지지 않는 기대로 만들어진 크레파스. 일요일이 나를 보내고 있다. 남들 다 하는 걸 왜 하는지 알겠더라 언니. 초도 꽂구, 십구팔칠도 세보고, 종소리도 듣고 그랬지. 새해 안부를 묻는 동생의 이야기에 늦은 초를 켜봤다. 초가 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석이의 말에 약간 웃었다. 솔직해지고..
그대에게-강아솔 그럴 수없이 사랑하는 나의 벗 그대여 오늘 이 노래로 나 그대를 위로하려하오 하루하루 세상에 짓눌려 얼굴 마주보지 못해도 나 항상 그대 마음 마주보고 있다오 겨를없이 여기까지 오느라 손 한 뼘의 곁도 내어주지 못해 불안한 그대여 나 그대 대단치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오 그럴 수없이 사랑하는 나의 벗 그대여 오늘 이 노래로 나 그대를 위로하려하오 하루하루 세상에 짓눌려 더뎌져가는 우리지만 나 그대 허다한 마음 다 받아줄 수 있다오 기다려주는 이는 없다며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한 채 지쳐버린 그대여 나 그대 대단치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오 이 노래가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오 아주오랜만에 기타를 들었네
이름 없는 소행성에 이름을 지어주지 말자 망한 나라가 있다. 나라가 망했으므로 그곳엔 사는 이가 없다. 밤이면 빛나는 소금산이 환하다고 들었다. 그 나라를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도대체 찾아갈 수가 없다. 그와중에 놀랍게도 나는 그 나라에서 쓰였던 말을 더듬거릴 줄 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믿음과는 소용없는 이야기다. 나는 가끔 그 망해버린 나랏말을 중얼거리며 이건 이름 없는 소행성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우주 어디를 돌다가 어느 날 지구에 가까워져 온다. 눈에 보이면 이름을 붙여주고 때때로 불러준다. 그러나 우주 어딘가로 유영하는 소행성은 아주 많고, 우리가 붙여줄 수 있는 이름은 아주 작다. 이름을 붙일 수도 읽을 수도 없는 존재가 지구 밖에 매매 산적한 것이다. 소행성은 이름이 없는게 어울..
네 시쯤 산책을 하러 나갔다. 일요일은 언제나 흐린 것 같다. 해는 이미 없었고, 해가 내려 앉은 온기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베개 두개와 버릴 옷을 정리한 비닐 봉지를 든 채였다. 집 앞에 있는 녹색 수거함에 베개를 넣었다. 셔츠 몇 개도 넣었다. 한 개는 색이 바라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번 입고 그 이후로 다시 안입게 되는 옷이었다. 다른 옷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재활용이 안되는 것으로 분류했다. '재'는 물론 '활용'도 마다한다. 나의 예전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쓰레기통에는 치킨박스와 애완동물 대변 패드같은게 있었다. 이 정도는 아닌데. 망설임 위로 버렸다. 한 번씩 모두 세탁한 옷이었다. 태우면 좋았을 것이다...몇 십번의 아침과 팔꿈치, ..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우리는 웃고 있었지만 두려웠어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우리는 두려웠지만 주저함은 없었어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우린 노래를 부르네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이제 비가 내리네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우리는 웃고 있었지만 두려웠어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우리는 무릎을 맞추고 손을 꼭 잡았어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우린 노래를 부르네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이제 비가 내리네 - MOT을 알게 된 것은 당시 멀리 있던 동생으로부터다. '진짜 좋아'라며 이야기했지만 동생이 호들갑을 떨수록 심드렁하게 넘기는 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그러고 몇 년이 지나 떨려오는 심정을 부여잡고 '진짜 좋아'라고 얘기하는 것이 우리 대화의 공식이었다. 그가..
불과 7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어둠이 빈 곳 없이 들어찼다. 홍등은 위태로웠고, 비가 보태졌다. 길 폭은 두 사람에게 어울렸고. 계단에서는 한 사람으로 충분했다. 문을 열어놓아 안이 잘 보이는 가게에서는 창 밖으로 바다가 잘 보였다. 그것은 식탁께에서 움직였다. 창으로 비가 내렸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부산하게 떨어졌다. 색색의 우산에도 사람들은 움직일수록 젖었다. 온 곳을 흐르는 취두부 냄새. 산세가 깊었고, 여기에선 보이지 않지만 겹겹으로 있는 산 어느 한 면에는 작은 집모양의 무덤이 가득했다. 사람들의 옷깃이 스쳐 거리를 상하게 둔다. 그러나 이곳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면 홍등이 켜질 일도 없겠다. 거리가 상하는 대신 이곳에 사는 이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다. 혼자 와보니 혼자는 어울리지 않는 곳..
나는 어떤 자가 예술가인가 아닌가를 감식할 때 먼저 그의 가슴속에 명쾌한 비극이 있는지 아닌지를 본다. 있지도 않은 비극을 가장하거나 한술 더 떠 비극을 극복하고 회화했노라 떠벌리는지 아닌지를 본다. 예술적 출세의 코스튬이 아닌 시의 원형질인 비극. 아름다운 개새끼들의 예술은 차선책과의 싸움을 즐긴다. 자기의 전체를 걸고 전진하는 그들의 투쟁은 화가 나면 날수록 늠름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 모든 새로운 것들은 쓰레기통 속에 있다. 또한 나의 예술적 소외가 나의 예술적 권위로 탈바꿈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우리 내부에 신처럼 살아 있는 비극은 반드시 필요한 과학이다. 이응준, 「개와 예술에 대한 몽상」 중에서. -
본래 크기에 비해 거의 2배 가까이 커진 시금치는 본래 시금치의 맛을 절반 넘게 잃어버린 것 같았는데, 맛을 보자 이상했고, 시금치가 아닌 것 같았고, 자신을 부당하게 취급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것 같았다. 엉터리 요리사가 만든 것 같은 국수는 확실히 엉터리 같았고, 보기에도 슬퍼 보였고, 맛 또한 슬퍼서 먹기 시작한 순간부터 슬퍼졌다.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밥맛이 떨어질 수도 있게, 거북한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때처럼 우선 거북한 마음을 먹고, 잔뜩 불만이 고조된 얼굴로, 말 못할 사정으로 국수에 악의를 품은 사람처럼, 아니, 거의 국수에 악의를 품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독한 마음으로, 거의 처절하게, 젓가락으로 께적거리며 먹었는데, 그렇게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무척 궁상맞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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