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 하나의 사진을 찍는 순간, 당신의 이른바 '결정적 순간'은 계산될 수도, 예고될 수도, 사고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란 쉽게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물론이죠. 늘 사라져 버리지요. 그가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일 초의 몇 분의 일인 그 순간을 어떻게 압니까. 데생에 대해 말하고 싶군요. 데생은 명상의 한 형태입니다. 데생하는 동안 우리는 선과 점을 하나하나 그려 나가지만 완성된 전체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데생이란 언제나 전체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여행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은 그와는 반대가 아닐까요. 사진은, 찍는 순간, 설혹 그 사진이 어떤 부분들로 이루어지는지조차 모르는 경우에라도, 하..
이주요는 2006년 개인전에서 라는 영상 작업을 보여주었다. 2003년부터 2006년 사이 진행된 이 작업은 작가 개인의 연애담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비단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무산 계급의 로맨스를 한강을 배경으로 처절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아나키스트적 마르크스주의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연애를 위한 둘만의 공간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작가는 아직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금전적 소득을 얻지 못하는 상태이고, 파트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지금 자신이 처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최대의 혹은 최소의 저항으로 여긴다. 그들에게 사랑을 위한 자신들만의 공간을 갖는 것은 사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한강이 있었다. 그러나 계절은 어느덧 겨울로 향하고, 추..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하게도 남자가 월경을 하고 여자는 하지 않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되면 분명 월경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생리량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댈 것이다. 초경을 한 소년들은 이제서야 진짜 남자가 되었다고 좋아할 것이다. 처음으로 월경을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과 종교 의식, 가족들의 축하 행사, 파티들이 마련될 것이다. 지체 높은 정치가들의 생리통으로 인한 손실을 막기 위해 의회는 국립월경분순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한다.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는 생리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한다. 연방정부가 생리대를 무료로 배포한다. 그렇지만 "총각들의 산뜻한 그날을 위하여"라고 광고하는 폴 뉴먼 탐폰이나 무하..
한편, 파우스트 사건에 대한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된 듯싶다. 모두들 염치 없게도 이에 대해 거짓말을 하였는데, 괴테는 누구보다도 더욱, 가장 천재적으로 그렇게 하였다. 사건을 위장하고 냉혹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역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희망을 앗아내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파우스트의 진정한 비극은 자기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비극, 그것은 당신을 위해 당신의 영혼을 사줄 악마가 없다는 사실이다. 구매자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건, 아무도 당신이 마지막 공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러 오지 ..
장자(長子)의 그림, 처남(妻男)들의 연주 문태준 황병승의 시 김종훈 1. 두 사내 이야기 2. 걱정 많은 장자와 불쌍한 처남들3. 처남들의 밴드, 그들이 연주하는 실험음악4. 붓을 든 장자, 독립된 묘사들5. 장자와 처남들의 만남 ... 5. 장자와 처남들의 만남 점보다 작은 수묵화를 본 적 없으며, 0초짜리 인디밴드 혹은 프로그레시브 밴드의 연주를 들은 적 없다. 그림은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여 점선면을 배치하며, 음악은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여 음표들을 배열한다.(...)장자와 처남들의 만남은 악기로 그림을 그리거나 붓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장자는 붓을 들었기 때문에 정지된 순간의 묘사를 기본으로 하고, 처남들은 악기를 들었기 때문에 긴장과 이완의 연주를 기본으로 한다. 그..
그들은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끝까지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근본적인 무능력 때문에, 혹은 불운해서, 아니면 어떤 평범한 사고에 의해 수용소로 들어와 적응을 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독일어를 배우기도 전에, 규율과 금지가 지옥처럼 뒤얽힌 혼돈 속에서 뭔가를 구별해내기도 전에 그들의 육체는 가루가 되었다. 선발에서, 혹은 극도의 피로로 인한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삶은 짧지만 그들의 번호는 영원하다. 그들이 바로 '무젤매너'(무슬림),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
1970년대 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 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
일을 받지 못한 날은 힘이 쭉 빠졌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이기에 타격이 컸다. 생활의 타격보다 일조차 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설움이 자학의 늪으로 청년을 끌어당겼다. 그런 날이면 청년은 텅 빈 잡부 숙소에 누워 종일 몇 번씩이고 자위를 하곤 했다. 어떤 땐 허물이 벗겨진 그곳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기도 했다. …일은 대개 건축공사장 일이었다. 어떤 날은 토목이었고, 어떤 날은 목수 데모도(보조공), 어떤 날은 조적이나 설비 데모도였다. 질통을 짊어지거나 방통을 치거나 공구리를 치거나 전선을 끌고 다녀야 했다.잡부들에게는 가장 지저분하고, 가장 힘겨운 일들이 남겨져 있었다. 청년은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이 소나 말이 되는 기분을 종종 느겼다. 하루 종일 말없이 골재를 옮기다 보면 인격이 아닌 체력으로만..
아기들은 태어나면 몇 달 동안 뇌가 자고 있고 몸이 깨어 있는대요.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 갑자기 우는데 그게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래요. 그걸 논램수면이라고 하나봐요. 나는 늘 몸은 잠들어도 뇌가 깨어 있는 기분이라 피곤한데 난 아기들처럼 잘 수 없나봐요. 책상에 앉아 아이의 뇌파를 보면서 아기의 꿈을 보았어요. 아이의 뇌실엔 정말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겠죠? 그중에 내가 말을 트고 싶은 세계가 있어요. 저 뇌파로다가가 조용히 물들고 싶은 세계가. 내 두 눈이 저곳에 잠겨 있어요. 곁에 몸은 벗어두고. p. 159 김경주, 『자고 있어, 곁이니까』, 난다. 를 봤다. 배를 깍았던 칼이 옆에 있었고, 맥주캔이 구겨져 있었다. 를 봤다. 수영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달리기를 뛰는 것에..
가끔씩 우리는 너로 인해 충분히 외롭다 엄마가 요즘 자주 우울해한다. 요즘 엄마는 자신과 나 사이에 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자신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건 일종의 외로움인데 너로 인해 관심을 빼앗긴 것이 섭섭한 것이 아니라, 네가 들어서서 생기는 충만한 감정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충일한 감정에서 생기는 두려움으로 인해 내게 생기는 동요 같은 것을 알아보는 외로움이 아닐까 싶다. 이 햇빛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내 몸에서 자꾸 밀어내려는 내 문학적인 허영을 엄마는 알아 본 거지. 아가야, 나는 사랑받는 느낌에 늘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이란다. 그건 설명하기 곤란한 내 수치심이기도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내가 가진 침묵의 많은 질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아직도 풀지 못한..
- Total
- Today
- Yesterday
- 뮤지컬
- 대만
-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 서해문집
- 열린책들
- 민구
- 이병률
- 지킬앤하이드
- 이준규
- 이장욱
- 후마니타스
- 궁리
- 이영주
- 일상
- 상견니
- 한강
- 피터 판과 친구들
- 정읍
- 희지의 세계
- 네모
- 이문재
- 차가운 사탕들
- 진은영
- 문태준
- 1월의 산책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현대문학
- 배구
- 김소연
- 책리뷰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