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한겨레출판, 2019 그녀와 나는 일로 마주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한 눈에 나는 그녀가 좋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책으로 먼저 말을 걸곤했다. 유년을 지방에서 보냈고, 장녀라는 몇 가지 단서 만으로도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한다. 반에서 어떤 그룹과 어울렸으며, 누구와 친했고 어떤 과목을 좋아했으며 좋아하는 선생님은, 급식실에 어떤 식으로 뛰어갔을까 하는 것등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종내는 거기서 나를 만났을까. 를 떠올려 우리가 친구가 될 가능성을 대충 점쳐 보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더라면 분명히 같이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깔깔거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말하는 책을 모르는 경우가 없었고, 안 ..
음악의 기쁨 롤랑 마뉘엘, 북노마드, 2014 ...브람스의 음악은 큰 강처럼 장중하게 유유히 흐릅니다. 명상에서 태어난 이 음악은 청중에게 주의력은 유지하되 다 놓아버릴 것을 요구하죠.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천성이 인내심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게 잘 안 됩니다. 눈치챘는지 모르지만 브람스 음악이 어울리는 풍토는 아다지오죠. ...브람스는 힘들이지 않고도 풍부한 감성을 형식의 요구에 맞출 줄 압니다. 형식은 절대적인 것이 되지요. 브람스 음악에서는 형식이 엄격할수록 음악적 발상이 수월하게 흘러나오고 감정이 박력 있게 드러납니다. ~143p 어디서 이런 책이 왔을까. 보물 같은 책. 질의 응답/ 니나 브로크만, 엘렌 스퇴켄 달/ 열린책들/ 2019 ...달리 말해, 모든 배아는 반대 방향으로 발달하라는 특..
목소리와 몸의 교양 고카미 쇼지/유유/2019 중학교 다닐 적에 한 놈이 "너 지금 이렇게 서 있어." 하면서 한데 웃고는 내가 서 있는 걸 따라서 한 적이 있다. 배가 앞으로 나오고, 어깨가 뒤로 꺾인 자세. 왜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서 있는 줄도 몰랐다. 무척 부끄러웠지만 알려줘서 그 놈에게 고마웠다. 그런데 이렇게 비웃음을 사기 전에, 왜 아무도 제대로 잘 서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걸까? 그 이후로도 제대로 서는 법 같은 걸 알려준 이는 없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어떤 자세, 어떤 발음에 대해 배워본 적 없는 건 계급의 문제라고. 이런 확신은 불경스럽지만 90%정도의 확률로 나의 부모님도 어떤 자세와 발음에 대해서는 배워본 적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배우셨더라면 그것을 나에게..
메리 더글러스 방원일/ 커뮤니케이션북스/ 2018 다른 책 주석에서 보고 를 구매했다. 메리 더글러스가 쓴 책인줄 알았는데, 당연히 그럴리가 없지. 그녀의 책 에 오염에 관한 관념에 대해 썼다고.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matter out of place)'라고 간명하게 정의한 적 있다.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소싯적에 더글러스의 통찰을 절감한 일화를 전한다. "집 안에서 흙은 더러운 것이지만, 집밖에서는 소중한 토양이네. 집안에서 밥을 먹을 때, 그리고 가족과 함께 할 때는 물론 흙을 털어 내야지. 하지만 밖에서 동물과 함께 작업하려면 반드시 흙을 묻혀야 하지 않나?" 이 대화에서 농민이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바가 바로 메리 더글러스의 핵심 논지다. 본래부터 혹은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교양인/ 2013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더욱이 편안할 수는 없다. 다른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사랑하는 안드레아룽잉타이, 안드레아/ 강연희 옮김/ 양철북/ 2015.11"나는 그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도, 그냥 아는 것과도 다르다. 사랑은 때로 좋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핑곗거리가 되곤 한다. 사랑이 있으면 제대로 된 소통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남자아이 안안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성장한 안드레아를 알아갈 수는 있다. 나는 열여덟 살의 이 사람을 알아야 한다." 사랑에는 무엇보다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것들이 '감정'의 전깃불, 이해할 수 없는 개인의 메커니즘으로 호도하는 사랑에 대해, 이 책은 사랑에는 노력이,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알고..
권력이란 무엇인가한병철/ 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6"권력 의지의 결핍은 의미의 공허로 이어진다. 의미란 우리가 그저 받기만 하는 선물이 아니며, 권력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획득한 먹잇감이다. 권력이야말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p.55의미의 공허라니. 연애의 책유진목/ 삼인/ 2016.5언젠가 이 사람의 블로그에 갔던 것 같다. 어떻게 갔는지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돌아다닌 발자국에 어두워진 길, 흐릿하게 그랬을 거란 짐작만 있다. 이 문장을 너무 오래 생각해서 몇 번이나 이 얘기를 썼던 것 같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학/ 2016"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 셰익스피어의..
중쇄를 찍자마츠다 나오코/ 주원일/ 애니북스/ 2016출판사 이야기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잘 그려냈다. 열정 없는 사람들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꾸리는 회사 이야기는 없나. 밝고 활기찬 이야기가 눈부셔서 두번은 읽지 못했다. 참외나 한쪽 먹어야지. 어쿠스틱라이프난다/ 애니북스/ 2016이쯤 되면 일가견있다고 해야겠지. 1권에서 시작해야 10권을 쓸 수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그리고 그 동안 늘 일하는 사람으로 있던 난다. 부러워 하는 건 언제나 쉽다. 창작자가 될 수 있을거라고 응원하는 한군의 믿음도 부럽고. 게으르지만 꾸준히 생활을 그린 난다의 끈기도 부럽고. 노트 다섯 권을 사기로 한 결심에 일주일, 한 권의 포장을 뜯는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산해경전발평, 예태일/ 김영지, 서경호/ 안티쿠스/ 2008물을 건너고 또 물을 건너고, 산이 나오고, 또 산이 나오고, 어디에서 머리가 없어도 춤을 잘 춘다는 기이를 읽으며 지냈다. 만화가 상경기사이바라 리에코/ 김동욱/ 에이케이/ 2011어떤 캐릭터처럼, 끝이 보이는 생활을 하는 주인공. 멋진 신세계슬라보예 지젝/ 김희상/ 자음과모음/ 2016지젝이 깜짝 놀라겠지. 자음과 모음 출판사가 어떤 곳인지 알게된다면. 좋은 책은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안토니오 그람시/ 김종법/ 바다출판사/ 2011
아노말리사 Anomalisa, 2015찰리 카우프만, 듀크 존슨/ 제니퍼 제이슨 리(목소리) 외 행복에 '지루하다'는 형용사는 올 수 없겠지. 권태는 불안이 절망할 모습이라고 생각해.그러므로 '아직' 불안하다는 것은 '곧' 행복하지 않음에 대한 염려일테고불안이 가능한 동안은 '조금은 행복함'이라는 상태를 염두해야 하겠지. 나의, 소중한, 불안. 사울의 아들 Saul fia, Son of Saul, 2015라즐로 네메스/ 게자 뢰리히 외 그동안 육면체를 얼마나 반듯하게 그릴 수 있을까에 맞춰왔다면 이것은 육면체 안을 헤집는데 집중한다.불편하고 불온한 것은 그 육면체의 안까지 들여다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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