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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이야기는 무너지고," *


 

 

 


 

목차는 반원으로 배치돼 있다. 활대 보이지 않는 시위가 팽팽하고. 작가의 손은 목차의 중간을 당겼겠다. 그래서 가장 가운데 솟아난 '매듭'부분을 읽어야 하겠지만, 첫 번째 실린 '살구'로 이미 마음이 어지럽다. 여기까지 쓰니, '매듭'을 중심으로 목차가 대구를 이루고 이루는 게 보인다. 시작은 '살구', 끝 역시 '살구'.

 

솔닛은 '당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묻다가 "종종 이야기가 당신의 무릎 앞에 떨어진다."며 잠깐 상념에 잠기게 한다. 그런 적이 있던가, 있지, 기지, 그렇지 싶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100파운드의 살구 더미가 도착한 적 있다며 너스레다. 무슨 얘긴가 살펴보니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살구였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살구는 무척 달지만 그 달콤함을 오래 간직하지 않는다. 무섭도록 쉽게 상해버린다. 게다가 자기들끼리 거리가 꼭 필요한데, 서로 만진 곳마다 쉽게 멍들기 때문이다.


살구가 아니라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것엔 윤리적인 문제가 걸려있다고 생각한다.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 진실할 것인가의 문제로서. 어머니에게 더해진 늙음의 비참을. 옳은 일일까? 옳다면 무엇을 위해서 옳을까. 그런데 이런 윤리적인 판단을 뒤로하고 어머니에 대해 쓰는 일이 우선 '용감'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솔닛은 딸과 '어머니', 그것도 늙고 병든 어머니와 대면하며 생긴 '무너진' 이야기를 적는다. 나는 저자 소개를 여러 번 뒤지며 솔닛의 나이를 추측하려고 애썼다. 사진으로 보이는 그는 아마도 어머니에 대해서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원숙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도망하면서 '살구'를 다섯 번 읽는다. 수번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단어와 어미를 대입하고 변주하기도 했다. 그러자 솔닛의 이야기는 없고, 남는 것은 나와 나의 어머니다. 솔닛이 바라는 것은 내 앞에 도착했을, 그러나 내가 살피지 못했던 살구 더미 같은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야기에서 삶의 말년은 그 모든 세월이 지혜가 되는 황금빛 시기이지,

엉망진창인 어린 시절로 혹은 그 너머로 퇴행하고, 정신병처럼 보이는 질병으로 썩어 가는 시기가 아니다. 20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워 간신히 걱정할 수 있는 미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년뿐이다. '늙음'에 대해서 별로 고민할 시간 없이 사람은 늙어버린다. 대도시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골목마다 쏟아져 나온 쓰레기, 아니라 그 더미 속에서 재활용할 것을 찾아 헤매는 늙은 손 아니던가. "노년은 전쟁이다. 아니 노년은 대학살이다."*** 대학살을 지켜보는 자식들. 솔닛은 자신의 어머니 치매에 걸린 이후를 적는다. 그는 무척 화가 나 있는데, 그것은 우선 어머니가 "아들들에게는 당신의 문제를 늘 숨겨 왔"으며 딸인 자신에게는 늘 문제를 던지기 때문이다. 진창인 삶 뒤에서 마른 면포를 깔아야 하는 딸, 물러오는 진흙을 치워야 하는 딸. 딸에게 부여된 노동으로 지켜진 존엄을 아들들에게 보여주는 어머니. 가부장제를 지키는 것은 여성인 나의 '어머니'. 절망은 이런 순간에 깊다.

 

솔닛은 어머니를 고향에서 자식들이 가까운 노인 아파트로, 다시 노인 요양병원으로 옮긴다. 아니, 옮기게 된다. 그는 "무너지는 어머니와 할 대화라는 게 혼란스럽고 위험한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조용히 말하며, 할 수 있는 것은 집 색깔이나 꽃에 대해서 만이라고 담담해서 더 내려앉는다. 그러므로 저 '살구'는 어머니 처소를 옮기며 정리한 어머니의 일부다. "그건 구원의 행동이자 불안함, 관대함의 행동이었다. 25"이라고 술회하는 부분에 100파운드나 쌓여 있는 살구는 역시 '살구'겠으나 그것을 어머니인 듯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 제각각 익기의 정도가 달라서 썩은 것을 골라내고, 무르지 않게 종이위에 깔아 놓는 것. 해서 그 무더기를 보며 솔닛이 끌어안는 생각은 단연 '백미'. 이 단편에서가 아니라, 삶의 면면에서 잊지 말아야 할


"그 무더기는 세상의 반대편에 사는 불새의 꼬리 깃털을 가져오는 일이라든가, 수수께끼나 감당할 수 없는 역경처럼, 불가능한 임무라는 범주의 변종에 불과했다. 26" 


그동안 솔닛에 대한 오해 하나를 푼다. 멋진 제목의 페미니스트 저서로 일약 스타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다. 그의 삶에서 체화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비로소 빛날 수 있었던 것. 솔닛을 다시 기억하기로 한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 가 아니라 멀고도 가까운』의 솔닛으로.  

 






* 14쪽.

**김중혁, 악기들의 도서관, 나와 B, 365쪽. 변주.

***필립 로스, 에브리맨,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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