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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삼내장젓갈
최정례
해삼은 이 집 주방이 두렵다. 칼이 무섭고 도마도 무섭다.
건드리면 지레 겁먹고 얼른 뭔가를 내놓는다. 한줄뿐인 내
장에 이상한 향을 품었다가 위험이 닥쳐오면 재빨리 내장
을 쏟아놓는다. 창자만 가져가시고 몸은 살려달라는 최후
의 협상 카드를 내미는 것인데, 인간 세상 협상 대신 내장
빼앗고 해감 반으로 잘라 양식장에 던져놓는다.
나도 당신이 두렵다. 두려움과 그리움을 구별할 수가 없다.
어젯밤 당신 내게 왜 그런 소포를 부쳐왔는가. 우편물이 왔
다고 해서 문을 열었는데 거기 묶인 꾸러미 위에 희미하게
당신 이름 적혀 있었다. 당신이 내게 뭘 보낼 리 없는데, 어
떻게 내 주소는 알게 됐을까 풀어보려는 순간, 이름 희미해
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대개 꿈 아니면 백일
몽이다. 두려움과 그리움은 눈 비비며 같은 구덩이에 산다.
그것들 소포 꾸러미처럼 가끔 날 찾아왔다가 순식간에 녹
아내린다. 당신들 내게 그렇게 호의적일 리 없지, 내가 내
속을 긁어내 환상의 꾸러미를 만들건 말건, 내장 긁어내 보
였다 다시 삼키건 말건. 어쨌거나 해삼, 어느 여름날 새끼줄
에 묶어 데려갔다가 흔적 없이 녹아내린 적 있었다. 분하고
원통한 것은 해삼인지 나인지.
그나저나 나는 시 같은 걸 쓴다. 별로다. 나는 시 같은 걸
쓰지 않는다. 그것도 별로다. 한밤중이다. 그건 괜찮다. 바
위틈으로 기어들어 부풀리고 굳어져서 아무도 꺼내지 못하
게 할 테다. 그러나 다시 내장 빼앗기고 반으로 잘려 던져
지는 해삼의 밤이다.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고 찍는 밤이다.
간이고 창자고 쏟아놓고 기다려주마. 이 내장 삭아 젓갈 되
면 그 아득한 맛에 헤어나지 못할까. 헤이, 미식가 여러분,
세상이 한판에 녹아내릴까.
최정례,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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