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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악기
허수경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 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 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낸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 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
시인은 어디까지 보고 어디를 다녀오는 걸까.
시를 하나 읽었을 뿐인데 책에서 눈을 떼면
그림 하나가 걸려있네.
어디가 가장 좋을까?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노래하는 것
그래,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어디 먼 데를 저 먼저 가고 있는 희망까지.
환장하게 좋네요.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허수경 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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