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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악기-허수경

_봄밤 2024. 5. 25. 21:00

 

불우한 악기

 

허수경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 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 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낸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 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

시인은 어디까지 보고 어디를 다녀오는 걸까. 

시를 하나 읽었을 뿐인데 책에서 눈을 떼면

그림 하나가 걸려있네.

 

어디가 가장 좋을까?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노래하는 것

그래,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어디 먼 데를 저 먼저 가고 있는 희망까지. 

환장하게 좋네요.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허수경 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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