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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중요한 단어가 빠져있다. 바로 <남자>. 거기에 '양육자'를 추가한다. 그래서 이 책에 가장 알맞은 제목은 <아빠>는 어떻게 돼? 이다. 자유롭게 아이들을 방임 양육하고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준다는 이야기를 주 양육자인 '여성, 어머니'를 살뜰히 제거하며 진행한다. 이런 이야기에도 남자가 발언권을 쥔다(아니 쥐어준다). 아이를 4명을 키우는데, 그것도 한국 남자가 일본에서, 라는 이유가 특이점이 되는가? 이런 것을 특이하다거나, 시사점이 있다고 치켜세우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대단한 시선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한국계 미국인이 있다. 그(녀)의 이력도 하나도 모르면서, 미국에서 갑자기 유력한 인사로 떠오를 때, 국내의 언론이 갑자기 그를 '한국인'으로 호명해 기꺼워하는 행태와 비슷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닮았다는 점을 세일즈 포인트로 소개하는 점에서는 할 말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주 내용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해체돼 혈연을 떠나 이루는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이 해체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부장이라는 날개를 잃고 황망해 하는 찌질한 남자인 '나'를 알아차렸고, 그런 나는 죽어도 상상 속의 '아버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를 <어른>과 같은 말과 다름없이 사용하면서 무엇이 그리 기특한가. 이 문장의 제일 고약한 점은, <어른은 어떻게 돼?>라는 제목을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져왔다는 점이다. 애들이 그렇게 말해서, 가져왔어. 천진하게 의뭉스럽게 '어른 됨'을 '아버지'에게 묻는 형식. 글을 아빠가 썼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요? 라고 제발 묻지 말라. 남자=어른이라는 이상한 등식을 일본에서 아이들 4명을 키우는 성장기라는 무해한 형식으로 포장한 것의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지점은 '여자를 지우는 형식'이다.


여자는 어떻게 어른이 돼? 이 질문은 존재할 수 없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 책에서 여자는 어른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의 성원으로서 여자는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여자는 '아이'이거나, 그래서 어른인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미성년으로, 아버지를 놀래키는 질문을 하는 기특한 아이로 등장하거나, 한국의 실정을 잘 모르는 온화한 외국인으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2018년의 한국의 실정에 맞는 기획, 이야기라는 점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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