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자신이 나를 환대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날 그는 내 손의 금반지를 보고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었으리라.
"금반지에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금이 없다면 '구멍'(그렇다면 구멍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으리라)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금은 구멍이 없더라도 존재한다) 또한 반지가 아니다. [....] 구멍이란 그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금에 힘입어서만 (어떤 부재의 현전으로서) 존재하는 무無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행동인데, 이러한 인간은 그가 '부정하는' 존재에 힘입어서 존재 속에서 무화하는 그러한 무일 수 있으리라"
_<역사와 현실 변증법>에서 나온 문장, <사람, 장소, 환대>의 92p 주.
어떤 부재의 현전으로서. 존재하는 무.
컵을 쥔 손을 자연스럽게 보는 잠깐의 사이에 이 문장을 떠 올릴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오늘, 들었다. 생각하면 어지러운데. 그날 나는 그게 물인지, 물이 아닌지 모르고 한 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다시 입이 생겼기 때문이다. 입이 말하고, 입이 마시고, 얼굴 가운데에서 입은 마침내 그만한 크기로 웃었던 것이다.
그것까지도 그는 알았을지 모른다.
이제는 입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사람처럼, 입을 가리고, 얼굴로 운다.
나는 왜 환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저 쪽에서 팔을 벌리고 있는데.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나를 환대한다는 사실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다시 입을 가리고 운다.
'이후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애 생각으로 하루 종일 걸을 수도 있다 (0) | 2019.01.06 |
---|---|
수영 풍경 (0) | 2018.12.19 |
2018년 11월의 산책 (0) | 2018.12.04 |
<남자>를 <어른>으로 부르는 일에 대하여_<어른은 어떻게 돼?> (0) | 2018.12.03 |
길고양이가 시를 쓰면-「잘 있어」_이상협 (0) | 2018.11.13 |
- Total
- Today
- Yesterday
- 이문재
- 1월의 산책
- 민구
- 지킬앤하이드
- 이영주
- 상견니
- 이준규
- 네모
- 피터 판과 친구들
- 이장욱
- 후마니타스
- 궁리
-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 김소연
- 한강
- 문태준
- 일상
- 차가운 사탕들
- 책리뷰
- 정읍
- 뮤지컬
- 이병률
- 배구
- 열린책들
- 진은영
- 현대문학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희지의 세계
- 대만
- 서해문집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