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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글

금반지

_봄밤 2018. 12. 13. 22:33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자신이 나를 환대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날 그는 내 손의 금반지를 보고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었으리라. 


"금반지에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금이 없다면 '구멍'(그렇다면 구멍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으리라)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금은 구멍이 없더라도 존재한다) 또한 반지가 아니다.  [....] 구멍이란 그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금에 힘입어서만 (어떤 부재의 현전으로서) 존재하는 무無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행동인데, 이러한 인간은 그가 '부정하는' 존재에 힘입어서 존재 속에서 무화하는 그러한 무일 수 있으리라" 

_<역사와 현실 변증법>에서 나온 문장, <사람, 장소, 환대>의 92p 주.

 

어떤 부재의 현전으로서. 존재하는 무. 


컵을 쥔 손을 자연스럽게 보는 잠깐의 사이에 이 문장을 떠 올릴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오늘, 들었다. 생각하면 어지러운데. 그날 나는 그게 물인지, 물이 아닌지 모르고 한 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다시 입이 생겼기 때문이다. 입이 말하고, 입이 마시고, 얼굴 가운데에서 입은 마침내 그만한 크기로 웃었던 것이다. 


그것까지도 그는 알았을지 모른다. 


이제는 입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사람처럼, 입을 가리고, 얼굴로 운다. 


나는 왜 환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저 쪽에서 팔을 벌리고 있는데.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나를 환대한다는 사실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다시 입을 가리고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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