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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글

아치디에서

_봄밤 2019. 1. 29. 23:33



<아치디에서>를 읽었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에 수록되어 있다. 대상은 <모르는 영역>. 읽다가 말았고 <아치디>에서를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네 번도 읽을 것 같고, 다섯 번도 가능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만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글은 최소한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2030대의 고립, 화남, 두려움, 연민, 그리고 사랑에 비슷한 감정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닿아있다. 단지 글일 뿐인데도, 이국의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온 것 같다. 오늘도 


말이 없는 얼굴로 상대방의 눈을 거의 보지 않은 채로. 제일 힘들다는 것처럼, 무능력함이 지겹다는 말을 말이 아닌 걸음걸이로 보여준 사람이라면 <아치디>에서 하민의 얼굴을 대번에 그려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지만, 그곳에서는 누군가 물어올 이상한 얼굴이니까. 왜 화가 났어? 당신은 아마도 화난 거 아니야. 라고 하겠지만, 아는지. 하민도 그렇게 대답했다.   




스탠드에 앉아 있으면 몇몇 사람들이 말을 걸기도 했다. 웃으면서 답했지만, 대화를 잘 이어나갈 수 없었다. 외로웠고 누구라도 붙잡아 말을 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실제로 대화가 시작될까 봐 겁이 났다. 그건 이상한 감정이어서, 내게 말을 건 사람들은 곧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떠났다. 스탠드에 앉아서, 민박집 부엌에 우두커니 앉아서 나는 내쫓기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사람의 처지라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그런 감정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264p


:: 내쫓기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사람의 처지.


브라질에서는 뭘 했어요?

대학에서 영어교육과를 다녔어요.

졸업은 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은 뭘 했어.

동네 해변에서 파라솔을 빌려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해변 매점에서도 일했고요.

그의 얼굴에, 거의 다정하다고 할 법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한 번 웃더니 한숨을 쉬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 그의 얼굴에, 하고 찍힌 쉼표.

작은 한숨과 말잇지 못하는 실망과 기대가 꺾이는 소리를 감춘다. 


랄도, 널 사랑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네 엄마로 사는 거 진짜 돌아버리는 짓이야. 내 마음 약한 거 이용해서 상황 바꾸려고 노력하지 마. 안 먹힐 테니까. 267


:: 널 사랑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적이 너무 많았다. 

들었더라면 조금 안심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 널브러진 비닐봉지 같은 존재였다고, 바람이 불면 허공으로 날아갔다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걸려버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고 있었다고 말이다. 내가 그 말을 할 때 하민은 화난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하민은 화난 사람 같았다. 269


:: 비닐봉지 어쩌구가 마음에 들어서 적었겠는가. 

하민이 날카롭게 쏘아보는 얼굴이 비닐봉지 같은 사람 앞에 있다는 게 좋았다. 


기분 전환 삼아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더 울적해졌다. 내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어서였다. 집집마다 불이 켜져 있었지만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분위기. 


엄마도 예전에는 그런 말을 했었지. 그나마 내게 인간적인 기대가 남아 있었을 때는. 너 왜 여기 있어? 그 말 이후에는 언제나 싸움이었다.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말했을까.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나는 엄마의 그 말을 떠올렸다. 랄도, 너 왜 여기 있어? 나를 보던 일레인의 회색과 초록이 섞인 눈동자를 떠올렸다. 네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답했지만 그날, 지붕 아래에 앉아서 나는 그때의 내 대답이 옳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너 왜 여기 있어? 282


::너 왜 여기 있어?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세 시간 동안 샤워하기. 돌아와 다시 두 시간 동안 샤워하기. 

그 뒤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열여섯 시간 동안 텔레비전 보기. 283


::마음이 아팠다.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하민은 종종 그 말을 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 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287


: 굉장히 평범한 이야기, 다른 입을 통해 듣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하민은 내내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왜 퇴직하게 되었느냐고. 탕비실 정수기 앞에 나란히 서 있을 때였다. 그녀는 텀블러에 물을 따르고 하민을 보더니 별말 없이 웃었다. 하민이 다시 물었다. 왜 관두느냐고. 

그녀는 텀블러에 시선을 뒀다가 다시 하민을 보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뜻밖의 말을 했다. 

하민 씨 눈엔 자기가 어떻게 보여요?

그녀는 상냥한 말씨로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302


:: 상냥함을 동반하는 경멸.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넌 네 삶을 살 거야. 





소설은 안감힘을 쓰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묶이지 않는다. 


그들은 둘이 숨을 쉴 수 있는 공터 하나를 발견했고 

거기에서 조금 걷다가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좀 나눴다.

서로가 소중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시간을 꾸미고 위로 아무렇게나 쌓여서, 마음껏 아끼고 마음을 더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이 명징한 날들을 얼마간 덮어야 가능했다. 


이들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모든 매스컴이 말하는 신화가 사랑을 향할 때, 그러지 않기로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지키고 싶은 온도가 귀가 차가워질 온도라면 이 주위에 무엇을 두어야 할까. 나는 이것을 데우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뜨겁게 하는 일이 언제나 필요하고, 옳다는 신화가 옛 것으로 읽히는 일이 이상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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