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울었고, 그건 그가 어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른이었고, 보기 드문 사람이었는데, 나는 사람과 어른을 만나서 눈물이 났다. 그게 한 사람인 것은 아주 드물었고,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는 건 더 드물었다. 이런 눈물은 처음 해 보는 것이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만나기도 전에 헤어진 사람 같았고, 사람을 알아준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존경하기를 원했다. 나에게 존경이라는 마음이 생기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나에게 이야기 한 시간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내가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 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알지 못함에도 붙들었던 것. 그건 잘못이었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알지 못하는 작은 상자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
두 사람은 찰나의 순간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딛는 한 걸음. 서로를 껴안는다. 무시무시한 힘의 포옹. 마치 상대방을 자기 안에 으깨어 넣기라도 하려는 것 같다. 머리통이 쪼개져라 밀착된 머리들. 가슴팍에 파묻혀 산산조각 날 것 같은 어깨들. 죽어라 껴안느라 고통스러운 팔들. 두 사람은 목도리, 윗도리, 외투의 회오리 속에서 뒤엉킨다. 사이클론에 맞서 암벽처럼 버티려고 부둥켜안을 때, 허공으로 몸을 날리기 전 돌처럼 굳어 끌어안을 때의 그런 포옹. 어쨌든 세상 끝 날의 그 무엇. 그 순간, 그것은 그 둘을 같은 시간, 정확하게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접속하게 만드는 몸짓이자(입술끼리 부딪힌다) 둘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는 동시에 없애 버리는 몸짓이기도 하다. 그 둘이 서로를 풀어 줄 때, 그 둘이 마침..
공기를 슬퍼하는 사람미싱 영업을 하면서 '실'의 냄새와 촉감으로 감수성을 붙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상수는 단박에도 영업을 잘하는 이가 아니다. 그는 '제인에어가 어린 시절, 불우 아동들을 위한 기숙학교에 갔을 때 경험했던 그 교사의 차가운 공기가 상상되어 울었'던 이다. 이건 단순히 책을 많이 읽어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소설 속의 공기가 상상되어서 우는 이. 그의 정체성은 두 개로 갈라져 있다. 그게 직장에서의 삶을 어딘가 모르게 자꾸만 뒤쳐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의 퇴근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가 다름 아닌 낙하산이기 때문이라는 오해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완성한다. 국회의원의 아들, 불우한 어머니의 생을 지켜본 감수성 짙은 아들,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이 회사에 올 수 있..
주말이었나, 아니 금요일 아침부터였다. 공사가 시작되었다. 예고 없이 아침 일찍 드릴 소리로. 알고보니 1층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반 층 더 내려간 집의 공사였다. 녹물이 나온다고 했다. 집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 일하시는 분들이. 수도 공사라고. 나도 그렇다. 쓰면서도 이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녹물이라니. 물을 틀면 녹이 든 물이 나온다는 거지. 어디 먼 얘기가 아니다. 30, 40년 된 단독주택, 재개발 지역, 낡아가는 집들. 나가는 사람들. 재개발을 환영한다는 대기업 건설사 현수막이 집보다 높은 데서 펄럭이고. 그리고 밀려나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 공사는 토요일 아침에도 계속되었다. 녹물이라니, 당연히 공사를 해야지. 그러나 녹물이 나와서 공사를 한다고 해도 시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갔다 ..
길에서 슬픈 엉덩이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잠시 그 사람의 얼굴이 걱정되었다. 몸의 어느 부위의 살집과 상관없이 엉덩이가 없으면 당장에 아픈 사람보다 더 안된 처지일거라고 이해했다. 슬픈 엉덩이. 바지가 꺼져버리는 것. 살이 있을 자리에 대신 울어버리는 바지. 주름이라고 하기 뭐하고, 응당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천이 하릴없이 서로 부대끼고 반질거리는 것. 엉덩이가 있다는 건 왠지 안심이 되었다. 몇 끼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고, 어디 넘어져도 괜찮을 것 같고, 그러니까 죽음과 멀어 보였다. 처음 그린 인골이 어디에 누워 있었는지는 생각나지는 않는다. 몇 백구였을 테니까. 저마다의 뼈로 누워있거나 사라져 가는 뼈를 부여잡고 있는 아주 작은 묘를 들여다 보는 일이 하루였다. 갈비는 안쪽으로 바깥쪽으로 부서..
사회의 면면에 채이면서 일도 하고 사랑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건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말' 아니면 '마음'의 어떤 상황에서 헤매던 한국 소설이 출근과 퇴근, 야근과 파견, 파업의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파업일지를 나는 이 소설에서 처음 봤다. 파업하는 분들과 연대했더라면 진작에 그 존재 정도는 알수도 있었을 지 모른다. 비로소 동시대의 소설이며, 깊이 위로 받을 수 있었다. 한 문장도 버릴 곳이 없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썼다.
약속처럼 버스는 삼척을 향해 갔다. 평창에서 잠시 쉬었다가, 동해를 지나서, 도착했다. 삼척의 시내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듯 적막했다. 관광안내소는 닫혀 있었다. 괴발개발 쓴 글씨로 점심으로 자리를 비웁니다. 라고 적혀있는데, 그때가 11시 20분이었다. 점심시간은 1시까지였다. 근처의 배너를 읽었다. 도시를 한 바퀴 도는 관광버스는 아침 9시 반에 출발해서 삼척의 여기저기를 도는데, 하루에 한 대였다. 이미 놓쳤고, 내가 볼 수 있는 건 이 근처의 바다 밖에 없었다. 삼척에 왔는데 왜 바다가 보이지 않는가 생각하며 길을 찾아보았다. 택시로 5분을 가면 삼척해수욕장이었다. 그런데 걸어서는 50분이라고 나와있다. 버스를 찾아보았는데, 삼척 시내에서 삼척 해변으로 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꼴이었다. 배..
자다가 문득 오른쪽 발에 손이 갔다. 새끼발가락만한 허물이 이제 시간이 되었다는 듯이 슬슬슬 뜯어지고 있었다. 대만에서 생긴 물집이 이제 낫는 소리였다. 하얗게 불어올라 순하게 뜯어지는 살점을 방바닥에 모아두니, 발바닥 가운데는 동그랗게 홍조를 띤, 연한 살이 다시 바닥이 될 참이었다. 대만에 다녀온 지 한 달이 되었다. 6월 초 대만의 남쪽 컨딩과 가오슝에 다녀왔다. 우선 가오슝이 어땠는지 말해야 하는데, 아직도 심신이 왠지 모르게 흥분하게 된다. 두서없이 말하게 되고, 왠지 모르게 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까지 더울 줄 몰랐다. 덥고 습한데 맑은 하늘의 부조화, 말 그대로 뙤약볕을 걸었던 게, 당시 서울은 선선했기 때문이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 중 하루는 가오슝보다 더 잊고 싶은 타이난에 있었..
수영을 처음 배운다는 것 수영하자는 다짐을 새해부터 벼려 왔으나 1월 반 신청은 이미 작년에 끝나 하고 싶은 마음을 한 달 더 간직하며 허송세월 하던 자들이 2월 초 각 레인에 대거 투입되었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제와 말하지만 그 첫날 아수라장이던 샤워장을 잊지 못한다. 씻으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는데 이것은 마치 만 가지 모습의 지옥 중에 한 조각을 본 것만 같았다. 이런 지옥도는 강남 부근에서 타는 퇴근길 9호선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지난날의 죄를 생각하게 된다. 뭔가 잘못해왔던 게 틀림없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벌 서듯 줄지어 있는데 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고 하수구는 막혀 거품 가득한 물이 발목을 적시고 있었다. 그 물이 복숭아 뼈에 닿았던 자로서 나는 수영이 만만치..
내가 보기에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런 상처를 찾아내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주게끔 하려는 것 같다. 7p 녹색 불빛 아래 오시리스상이 불쑥 나타났을 때 나는 겁을 집어먹었다. 맨 처음 상을 알아본 건 당연히 내 눈이었을까. 아니다. 어깨 위로, 그리고 어떤 손이 짓누르는 듯하던 목덜미 위로 먼저 느낌이 전해졌다. 아니,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천 년 전의 이집트인들 사이로 나를 밀어 넣고, 준엄한 시선과 미소를 지닌 이 작은 조각상 앞에서 심리적 굴복을 강요하는 듯했다. 그 조각상은 신, 냉혹한 신의 형상이었다. 내가 겁을 집어먹었던 것은 분명 그것은 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자코메티의 몇몇 조각상들은 이러한 공포에 가까운 감정, 그리고 거의 같은 정도의 커다란 매혹을 불..
- Total
- Today
- Yesterday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정읍
- 대만
- 이장욱
- 현대문학
- 상견니
- 책리뷰
- 희지의 세계
- 일상
- 배구
- 이문재
- 열린책들
- 차가운 사탕들
- 이병률
- 서해문집
- 진은영
- 지킬앤하이드
- 궁리
- 한강
- 문태준
- 뮤지컬
- 이준규
- 이영주
- 네모
- 김소연
-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 후마니타스
- 민구
- 1월의 산책
- 피터 판과 친구들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