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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처음 배운다는 것
수영하자는 다짐을 새해부터 벼려 왔으나 1월 반 신청은 이미 작년에 끝나 하고 싶은 마음을 한 달 더 간직하며 허송세월 하던 자들이 2월 초 각 레인에 대거 투입되었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제와 말하지만 그 첫날 아수라장이던 샤워장을 잊지 못한다. 씻으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는데 이것은 마치 만 가지 모습의 지옥 중에 한 조각을 본 것만 같았다. 이런 지옥도는 강남 부근에서 타는 퇴근길 9호선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지난날의 죄를 생각하게 된다. 뭔가 잘못해왔던 게 틀림없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벌 서듯 줄지어 있는데 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고 하수구는 막혀 거품 가득한 물이 발목을 적시고 있었다. 그 물이 복숭아 뼈에 닿았던 자로서 나는 수영이 만만치 않은 운동임을 하기도 전에 알게 되었다. 모두들 이런 사태를 감수하고 수영을 하는구나. 모두들 좋아고 했는데. 하지만 이런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 나는 약간 말을 잃었다.
같은 목적을 갖고 모이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이라는 게 있다. 그게 샤워장에도 있었다. 몸을 굉장히 공들여서 닦는 사람들을 보며, 왜 그렇게까지. 라는 마음의 소리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열심히 닦는 건 다른 사람을 위해서였다. 수영장 물을 함께 쓰니까. 함께 마시고 내 몸에 닿았던 물이 다른사람에게 닿으니까. 사람들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닦는 듯한 표정으로 꼼꼼히 닦았다. 저마다의 닦을 것들은 오 만개의 냄새로 샤워장을 가득 채웠고, 어떤 각도도 포기하지 않고 닦는 자유로운 동작들에 놀랐다. 개중에는 털을 미는 사람들도 있고 때를 미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 굉장하다. 모든 것을 물이 쓸어가 주었다.
이 아수라장에도 알기를 오래한 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나누었다. 샤워장이 좁았기 때문에 그 미주알고주알은 내게도 들렸고, 굉장하게 씻고 있는 옆 사람을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며 저 이야기도 모른 척 하면서 내 몸 씻기가 쉽지 않았다. 이야기하는 상황을 처음 마주한건 정말로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1년 혹은 2년 혹은 그 이상 함께한 수영을 한 이들이었다.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어쩌면 나 자신보다 더 몸의 변화를 알아채주었을 타인이었다. 수영을 처음 배운다는 건 이런 유대를 처음 만나는 것과 같다.
수영을 배운다는 것에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혼이 조금 나가서 남들처럼 열심히 몸을 닦고 옆 사람처럼 수영복을 입고 앞 사람처럼 수영모를 정리했다. 옆 사람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수영을 처음 배운 이들은 샤워장에서도 베테랑 옆에 서는 것이 좋은데, 베테랑들은 샤워장의 가장 좋은 자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 시간 만나는 이들은 자기들만의 루틴이 있어 샤워장도 거의 지정석처럼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씻는다. 저마나 선호하는 자리가 다르겠지만, 내가 아는 베테랑은 바로 코너를 점한다. 하수구와 가깝고 모서리에 등을 기댈 수 있는 최적의 자리인 듯. 그리고 수영장으로 가는 동선도 가깝다. 동시에 모서리를 차지함으로써 샤워장 전체를 조망해, 베테랑 답게 자신의 레이더에 걸리는 이들중 뉴페이스에게 살갑게 말을 걸고 이미 친해진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는 노련함을 보인다. 베테랑이 누군지 궁금하다면 수영복을 보면 된다. 색이 5개 이상 섞인 것을 입거나, 내가 잘 모르는 브랜드의 수영복이거나, 내가 아는 브랜드의 수영복인데 모양이 낯설다면 그가 바로 베테랑일 확률이 높다.
하여간. 정신이 조금 나가서 수영복 입은 몸을 어색할 사이도 없이 우르르 사람들 사이에 끼어 수영장으로 나갔다. 운동 전 체조를 했다. 몸이 자꾸 붕붕 떴다. 첫 시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혼자만 물에 못 떴다. 모두들 수영이 처음이라고 했는데 거짓말하는 것 같았다. 침울하게 돌아와 혼자만의 목표를 세웠다. 1주일 안에 물에 뜨는 것이 목표였는데, 다음 시간에 거짓말처럼 몸이 떴다.
고독하게 그 누구와도 인사하지 않고 오로지 수영만 해야겠다는 다짐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안녕하세요, 하고 사람 좋게 웃고, 샤워장에서 이야기하지 말아야지. 나처럼 수영이란 무엇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매월 초 지난 달의 다짐과 함께 새로 들어온다. 1월을 놓친자들만큼 2월의 아수라장은 아직이지만, 한 해의 반이 끝나고 새롭게 반을 시작하는 7월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잔뜩 들어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여전히 샤워장에는 미주알고주알이 들려온다. 열심히 씻는 사람들이 있다. 거의 반 년을 함께 하고 나니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일 같지만.
사물함 키를 건네주시는 분과 인사하고, 강사님과 인사한다. 같은 레인에서 매주 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두 세 사람 정도와 인사한다. 단, 목소리는 없다. 목례뿐. 수영장에서 목소리는 가능한 줄인다. 물고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이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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