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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문득 오른쪽 발에 손이 갔다. 새끼발가락만한 허물이 이제 시간이 되었다는 듯이 슬슬슬 뜯어지고 있었다. 대만에서 생긴 물집이 이제 낫는 소리였다. 하얗게 불어올라 순하게 뜯어지는 살점을 방바닥에 모아두니, 발바닥 가운데는 동그랗게 홍조를 띤, 연한 살이 다시 바닥이 될 참이었다. 대만에 다녀온 지 한 달이 되었다.
6월 초 대만의 남쪽 컨딩과 가오슝에 다녀왔다. 우선 가오슝이 어땠는지 말해야 하는데, 아직도 심신이 왠지 모르게 흥분하게 된다. 두서없이 말하게 되고, 왠지 모르게 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까지 더울 줄 몰랐다. 덥고 습한데 맑은 하늘의 부조화, 말 그대로 뙤약볕을 걸었던 게, 당시 서울은 선선했기 때문이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 중 하루는 가오슝보다 더 잊고 싶은 타이난에 있었다. 쓰면서도 멈칫하는 게 가오슝은 쨍한 날씨와 더위라도 생각나지, 타이난의 고생에 대해서라면 입을 다물고 싶어진다. 그러니 컨딩, 컨딩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컨딩은 우리의 제주도와 비슷한 느낌으로, 남쪽 지방의 휴양도시이다. 가오슝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더 가면 도착한다. 스팟마다 해수욕장과 바다를 볼 수 있고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다. 작은 동네이기 때문에 스쿠터로 반나절이며 충분히 볼 수 있다. 사실 스쿠터를 빌렸다는 건 한 문장으로 끝나도 되는 일이지만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스쿠터를 빌리고, 조작법을 배우고, 가도 되는 곳과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적힌 현지 지도를 받아서, 아. 뭘 믿고 빌려주는 건지 걱정 없이 오, 이제 가면 되겠군, 하면서 저리로 가라며 배웅하는 너털너털한 손인사를 뒤로하고 출발해버리는 일까지 들어 있다.
이 중에서 아무 가게나 들어가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다 비슷한 가게이지만 좀 더 좋은 곳을 찾고 싶었기 때문인데, 비용이나, 스쿠터의 성능이나. 겉으로 봐서는 그걸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가까운 가게를 들어갔다. 반나절 빌리는 비용 400달러. 한화로 약 16천원이다. 스쿠터가 없으면 컨딩 전체를 둘러볼 수 없다(그 더위의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 다닐 수 없으므로) 자전거를 탈 수 있다면 충분히 조작 가능하다. 전기 스쿠터는 20km로 속도에 제한이 걸려 있었는데, 무슨 버튼을 누르면 40km까지 나간다고. 한참 익숙해지고 나서는 속도를 올려서 탔다.
컨딩의 바다는 해변을 따라 조금씩 다른 위치로 갈 때마다 다른 색의 바다를 만날 수 있다. 해변마다 이름이 있지만 이름을 모르고 갔다. 그건 좀 아쉬운 일이지만 그중의 한 구간에 한참을 앉아서 저 아래 바다를 바라본 일이 있다. 한 무리의 소떼를 지나서, 회색 뼈 같은 암석들이 돋아 있는 황토색의 평원은 충분히 넓었지만 벼랑도 곧이었다. 그 위로 낮게 자란 풀은 불을 질러 까맸다. 바다는 충분히 가까웠고, 저 아래에서 파도가 치는 거품도 보였는데 내가 갈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가까이 가도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놀랍고 기쁘고 먹먹해져서 누구의 뼈 같은 암석 위에 앉아 소리 없이 거품만 이는 바다를 봤다. 사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었던 것이다. 그게 좋았다. 내가 이렇게 앉아 있어도 누가 왔는지 바다가 모를 것 같다는 마음이.
그렇게 한참을 놀고 반납하러 오토바이 가게로 갔다. 그런데 오토바이 가게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액세사리 가게가 영업 중이었다. 여권 주고 빌렸는데 가게가 사라졌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 스쿠터로는 소용도 없는 가오슝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음 다음날에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좀 웃다가 액세사리 가게 근처에서 서성였다. 이게 뭐람. 소용을 다한 스쿠터에서 내려 골목 근처에서 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점점 밀렸다. 야시장의 막이 올라 사람들로 점점 두꺼워지는 골목에 있을 자리가 점점 좁아져들었다. 그때 액세사리 건물 안쪽에서 내게 오토바이를 빌려주었던 사람이 걸어 나왔다. 나를 알아보더니, 아니 내가 갖고 있던 스쿠터를 알아봤던 것이겠지만 여권을 꺼내 왔다. 오토바이를 슥 보더니,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나도 야시장의 무리로 숨어 들어갔다. 버스와 자동차와 스쿠터와 도로 양옆을 밝히는 가게와 그곳을 지나는 사람의 경계가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낡아가는 대만에 대해서 생각했다. 건물은 후지기가 짝이 없다. 무너지지 않게만 지은 듯이 보이는 볼썽사나운 건물들. 건물이라는 말도 사치스러운, 가건물이라고 한다면 그쪽도 인정할 집들. 집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대충 지은 천장 아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건물은 도무지 늙을 줄을 모르고, 한 없이 낡아서는 부서져 내린다. 집 외벽 검게 검게 녹이 슬고 얼룩덜룩한 아래에서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팔고 사는 사람들. 또 대만에 왔다. 거리의 질서나 미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곳에 다시 오다니. 무슨 매력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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