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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의 아틀리에>
내가 보기에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런 상처를 찾아내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주게끔 하려는 것 같다. 7p
녹색 불빛 아래 오시리스상이 불쑥 나타났을 때 나는 겁을 집어먹었다. 맨 처음 상을 알아본 건 당연히 내 눈이었을까. 아니다. 어깨 위로, 그리고 어떤 손이 짓누르는 듯하던 목덜미 위로 먼저 느낌이 전해졌다. 아니,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천 년 전의 이집트인들 사이로 나를 밀어 넣고, 준엄한 시선과 미소를 지닌 이 작은 조각상 앞에서 심리적 굴복을 강요하는 듯했다. 그 조각상은 신, 냉혹한 신의 형상이었다. 내가 겁을 집어먹었던 것은 분명 그것은 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자코메티의 몇몇 조각상들은 이러한 공포에 가까운 감정, 그리고 거의 같은 정도의 커다란 매혹을 불러일으킨다. 8p
그러나 -아직도 아주 모호하긴 하지만 -모든 예술작품이 가장 웅장한 범위에 이르러면, 무한한 인내와 노력으로 작품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태고의 밤과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러한 작품 안에서 죽은 자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9p
아직 여기 우리들 눈앞에 우뚝 서 있긴 하지만, 자코메티의 형상들은 죽음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어느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눈으로 불러낼 때마다 우리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오려고 이 상들은 매번 그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아....)10p
그- 길 가다 옷을 제대로 다 입은 여자를 보면 그저 평범한 여자로 보이지요. 한데, 그 여자가 방안에서 옷을 벗고 내 앞에 서 있으면 여신으로 보입니다. 14p
(장 주네와 자코메티에게 여자는 사물에 다름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고독에서 여자는 제외되어 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야말로 추하게 생긴 이 왜소한 노인네를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게 짧은 순간이었는지 강렬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그때 갑자기 고통스러운 느낌-그렇다, 그 누구라도 다른 모든 이들처럼 분명히 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아니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오히려 '분명히'라는 말에 있다.
...내가 느낀 그대로를 말하자면, 그의 조각상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이 혈통적 유사성은, 개개의 인간 존재가 마지막으로 모여들게 되는 지점, 더는 다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소중한 귀착점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다른 모든 존재와 정확하게 똑같아지는 우리들 각각의 고독의 지점. 23p
내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존엄성, 뿌리 깊이 단절되어 있어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렴풋한 인식을 의미한다. 26p
자코메티의 조각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가장 멀리 덜어진 극한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친숙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그 왕복에 의해 지탱되는 것 같다. 이 오고감은 끝이 없으며, 그것이 바로 조각들에 움직이는 느낌을 주고 있다.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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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다. 그러므로 내가 사로잡혀 있는 필연성에 대항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일 수밖에 없다면 나는 파괴 될 수가 없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나, 그리고 나의 고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본다."
마지막 문장에 눈물이 난다. 문장이 내가 원하는 사람의 형상이며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고독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본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는 61페이지의 아주 짧은 에세이이다. 자코메티의 조각에 대한 예술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장 주네는 예술론 같은 걸 쓸 생각은 없어보인다. 아주 조심스럽게 자코메티의 조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코메티와 나눈 이야기들이 이 에세이의 충실한 재료가 되고 있다. 자코메티의 조각을 보는 것보다 장 주네의 글을 읽는 편이 더 나을 정도. 살아있는 청동의 조각, 다리와 팔을 분리할 수 없는 조각, 자코메티의 나뭇가지 같은 조각에게서 그러한 것들을 보았던 것 같다.
장 주네의 책은 국내에 두 권이 번역되어 있다. <도둑 일기>가 나머지 한 권이다.
<도둑 일기>는 <불구의 삶, 사랑의 말>로 알게 되었다. 마지막 장에서 장 주네를 다룬다. <도둑 일기>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 자꾸 덮어지는 책이 있다. 못 이기겠어서. 행복하지 않아서. 그 다음이 궁금하지 않아서. 불행이라는 말 말고, 그보다 더 한 말이 발명되어야 <도둑 일기>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참한 감정이 겹겹으로 쌓여 지워지지 않고 굳는 데 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가 오지 않는다. 따개비 따개비 딱딱하게 솟은 겹겹의 바위에서 발바닥이 자꾸 베인다. 물이 없는 바닷가, 타는 태양. 이런 느낌이 <도둑 일기>였다.
약간 쓸쓸하고 또 외로웠다.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는데, 처음 해보는 머리가 어울리는지, 어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마냥 어색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이 주말로는 모자랐다. 적당한 머리가 주는 안정감이 이정도였다니, 이렇게만 벗어나도 불안하다니. 내가 속하고자 하는 장소를 알기 위해서 나를 제한한 곳을 벗어나는 일이 필요했을 뿐인데. 이 작은 것을 넘어갔다고 쓸쓸했다. 머리카락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나의 몸 일부가 나를 어떤 장소에 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가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내 얼굴에서, 조금 다른 모습이 되었다.
6월 첫 수영. 오리발을 찼다. 맨발이 새삼스러웠지. 너무 잘 나가서 물 속에서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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