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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1호선은 한산했다. 지상으로 달리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바다와 점점 가까운 풍경에 도착하는 것 같았다. 인천에 가는 중이었다. 언젠가의 비슷한 기억을 찾았다. 그때는 십 년 전이었고, 바다가 보였고, 바다와 맞닿은 하늘에 크고 하얀 구름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던 나 역시 풍경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다. 창가로 몸을 돌려 바라보는 얼굴, 팔꿈치와 신발. 다른 카메라로 이 열차를 바라보는 듯이. 그때는 일본이었다. 여전히 기억 한 편에서는 그 구름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내리고 내가 도착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의 끝자락. 이 문을 통과해서 올라가면 공원이 이어진다. 최상의 기호들로 가득한 문. 그중 최강은 현판을 버리고 벽에 문이름을 넣은... 실용성이다. 멀리서도 잘 보인다.
인천역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차이나타운은 빨간 문으로 사람을 맞는다. 인천역을 고대하며 내렸지만, 내리자마자 잊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역 앞의 공터에서 차이나타운 입구를 찍기 위해 거리를 두며 잠시 서 있는데, 역 앞의 공터는 단지 그러기 위한 장소로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이와 반대로 인천역을 사진 찍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장소는 점점 그 지역을 말하는 이미지로서의 의미가 쇠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천역'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어의 힘이 이미지에 대적할 바 없이 지고 있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이 확인을 다시 문자로 쓰고 있는 일이 실소가 난다. 구태여 정리하지 않아도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알고 있는 것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지지 않는 것들.
오늘날 인천역은 차이나타운, 혹은 그 밖의 인천으로 데려다주는 것 의외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듯하다. 시공을 이동하게 하는 작은 원처럼, 그 원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인천역은 그가 태우고 헤어지게 했던 사람들의 숫자만큼 많은 이야기를 간직했겠지만, 아무도 그 검은색 원의 기원과 사정을 궁금해하거나 기념하지 않는다. 그 원은 아무 데나 생기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의 시간과 장소에서 말이다.
차이나타운은 야트막한 경사로 사람을 천천히 끌어모은다. 그리고 그 끝에는 공원이 있다. 그 공원은 단순히 숲을 조성하거나 쉴 곳을 마련한 시설을 넘어서 한미 수교 기념탑, 맥아더 동상 등을 마련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은 더욱 이상한 공간으로 보인다. 언덕을 다 올라오면 타운의 끝에 왔다는 느낌인데, 숲은 한창을 푸르러 녹색이고 그 아래의 건물들은 곳곳이 붉다. 두 개의 나라, 두 개의 역사. 하나는 움직이고 있는 풍경으로 실력을 보여주고 있고, 다른 하나는 과거를 기념하는 일만으로도 팽팽하게 힘을 미치고 있었다. 현대사가 만든 두 개의 풍경이 계단의 단차로 있었다.
이곳은 연인이나 가족단위의 사람들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청소년들도 많이 오는 곳 같았다. 요새의 유행인지 작고 귀여운 머리핀을 팔고 있어, 놀이공원의 머리띠처럼 머리마다 올라와 있는 걸 보는 게 재미있었다. 이 공간만의 표식. 재미있는 약속으로서의 머리핀. 그걸 하기로 한 무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머리마다 탐스러운 하트나 병아리의 핀을 꽂았다. 길거리 가게마다 포츈쿠키가 쌓여 있었다. 두 개에 천원, 혹은 하나에 육칠백원 하는 이들을 까서 그 안에 있을 한 구절을 작게 읽는 연인들, 오늘의 의미를 오래 간직할 나이 어린아이들. 의미를 만들고 발견하고 전하기를 그치지 않는 이색적인 공간은 기억할만한 놀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분주했다. 살아가는 중이었다.
조금 더 걷자 언젠가 TV에서 본 화덕만두와 중국식 파이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줄을 섰고,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여러 중국집들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호객행위를 했는데, 중국집만으로 가득한 곳에서 사람을 불러 모으는 풍경은 낯설었지만 또 금방 적응되었다. 몇몇 유명한 집에는 줄이 길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에는 점심때에도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런 이름이 있을까, 싶은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집의 이름은 럭키차이나. 한산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테이블을 지켰다. 차이나타운의 유명한 짜장면과 짬뽕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풍경을 만드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대불호텔 외관
이날은 마침 영화제도 있었다. 찾아보니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디아스포라 영화제> 잠시나마 인천의 거리를 걸었다. 그물 가게가 있었다. 기름냄새가 진동하는 부품 가게가 있었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호텔도 보였다. 디아스포라 영화제 메인 부스에 도착했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시간에 맞는 영화도 보기로 했다. 조금 더 인천의 안쪽으로 들어오자 근현대를 기억하는 건물이 많이 보였다. 정확한 시간을 간직했으나 그 이후로 시간이 덧입혀지지 않는 최근의 것들. 인천은 생각보다 복잡한 이야기를 갖고 있었고 그 이야기에 쓰러지지 않는 자신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오늘을 가져야 했던 것처럼 보였다.
영화는 대불호텔의 연회장에서 상영되었다. 개화기 때 서양인들을 맞이했던 유명한 장소였다고 한다. 당시의 실내를 구성하면서 흑백의 사진으로 당시의 풍경을 전시하고 있었다.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공단이 깔린 '연회장'에서 <엘리스 죽이기>를 보았다. 북한에 놀러간(말 그대로 놀러간) 재미동포 신은미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디아스포라, 나는 몇 겹으로 겹쳐진 공간에서, 의자 위에서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분명히 이 공간을 밟아서 나가겠지만, 어떤 장소에도 머물렀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곧 인천을 떠난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었다.
상영된 곳이 다름 아닌 인천이라는 점은 영화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었고, 원래의 이야기가 세웠던 각을 여러 개로 더 쳐내 좀 더 곱씹도록 만들어주었다. 누군가의 의지가 너무 많은 탁자를 보았다. 그것은 모서리가 다 잘려 있다. 탁자의 조각들이 연회장을 나오는 곳곳에 떨어져 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신은미에게는 여전히 두 개의 언어가 들린다. 그 뜻을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 불행한 언어였다.
그리고 이날은 인천에 큰 불이 났었다. 오전부터 불이 났던 것 같은데, 인천을 떠날 때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유독한 냄새가 가까웠고 멀리서도 연기가 잘 보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다고 들었다. 불을 끄기 위해 헬기가 떠다녔다. 배 한 척이 타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인천을 걸어 다녔다. 이 연기 속 차이나타운에서는 어서 오세요, 하고 사람을 모으는 인사가 끊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신체로서의 인천. 놀러 온 도시의 불까지 차마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은 코와 입을 막으며 돌아다녔다. 인천에 대한 기억 한편에는 검은 연기를 쏟아내던 배가 있었다. 영화제에서 마스크를 나눠주었고, 비로소 자연스럽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상하지. 그러나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점이 가장 이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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