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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 <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



1946년부터 1978년까지 쓴 존 치버의 단편집. 책 읽는 모임에서 존 치버를 읽어보자 해서 이 사달이 났다. 단편집 중에서 제목이 재미있어 보여서 선택했다. (그러나 이 리뷰만 쓰고 팔아버릴 것이다) 이 책은 2008년 한국에서 초판이 나왔는데, 내가 2018년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바로 그 초판이다. 2000년대의 감성을 두루 갖춘 초판의 커버를 벗기고 모던한 커버로 바꿔냈다. 본문의 내용은 같다. 그럴수밖에. 아직도 초판이라니까. 


18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사실 읽을 필요는 없다. 시간 낭비이니까.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었던 단편은 '음악선생'이고, 그나마 봐줄만 했던 것은 '서랍장'이었다. 이름에 여자○○, 과부, 등 여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예 안읽었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 타자 치는 게 아까울 정도. 읽는 도중에 몇 번이나 집어 던지고 이 새끼는 뭐하는 새끼인가. 라는 심정으로 연보도 함께 보았는데, 1912년에서 그만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1912년 존 치버 출생) '신발사업이 쇠락하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부채를 갚기 위해 퀸시의 번화가에서 선물가게를 열었다.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는 모습은 어린 치버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했다.' 어떻게 여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살 수 있지. 뭐 이런 뜻인 것 같다. 1912년 생이니까 유년에 느꼈던 마음은 시대의 현상이라고 이해해두기로 했다. 


<음악선생>의 줄거리는 이렇다. 헤어지게 생긴 부부가 있다. 결혼 한지 십 몇년이 지났고, 애들이 셋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남자는 아내 제시카에게 십 몇년 전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 가자고 한다. (애들 키우면서 십 몇년 동안 못갔다는 얘기다) 제시카의 대답은 아이를 봐줄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알겠다고 대답한다. 부부가 밥을 먹기 위해서 당연히 아이를 맡겨야 하는데, 그 아이 맡기는 일이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다. 하여간, 그래서 제시카가 알아보거나 그랬을텐데, 결국 시터를 못 구한거다. 그래서 제시카는 그 레스토랑에 걷는 아이 둘을 데리고, 우는 아이를 손에 받쳐들고 들어가는데, 이를 지켜본 남편-시턴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왔는데 뭔가 일이 잘못되어 어쩔 수 없이 아이들도 데려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당하게 대한 남자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아이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취지는 극적이었고 고발 투였다.'


욕이 필요하다면 이런 때인 것 같다. 네이트판에 제 주제를 모르고 힘드니 저쩌니 떠들어 대는 남자들의 주제와 흡사하지 않은가? 좀 더 그럴싸한 문장으로 자신을 옹호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어떻게 되느냐, 애기를 셋을 혼자 키우고 매일 매일 요리를 태우는 아내에게 지친(?) 그는 자신의 친구에게 조언을 얻는다. 특별한 취미를 가져야 한다고. 피아노 레슨을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가 지쳐있는 일은 이런 것이다. '필리스가 또다시 맥주병 따개로 팔걸이의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변명은 이십오 센트짜리 동전 하나가 그 의자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조슬린과 밀리센트는 울고 있었고 제시카는 저녁 음식을 태우기 시작했다.'


애들은 당연히 난장판이고, 육아와 집안일에 지쳐버린 아내는 당연히 음식을 태울수 밖에. 이를 지옥이라고 여기는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거실 쇼파에 앉아 삶의 의미는 어디있을까 운운한다. 연애 때의 성생활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떠올리는 머저리같은 자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제목처럼 음악선생을 찾아간다. 


피아노를 배워본 적이 없으니 아주 간단한 것부터 레슨을 받는데, 집에서도 해오라고 숙제를 내준다. 시턴은 그걸 집에서 한 시간씩 연습하는데, '그 간단한 연습곡은 아이들의 기억에까지 각인되어 감염증이나 전염병처럼 그들의 삶 전체에서 반갑지 않은 일부'가 된다. 그걸 시턴만 모른다. 연습을 그만해달라고 애원하며 아내가 무릎을 꿇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을 향해간다. 이 단편의 엔딩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작가가 돌려돌려 말한 이 단편의 엔딩은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려 들면 죽는다.' 이다. 물론 명색이 소설가가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 아 그렇게 되었다고 합디다? 하고 의뭉스럽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수치를 모르는 자의 짓이다.  


<서랍장>은 조금 웃기다. 서랍장을 가운데에 두고 서랍장을 사용했던 이들의 세기를 겹겹으로 투사해서 보여주는 능력이 좋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서 뭘 얻을 수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잘 쓴다는 거다. 


바닷가 집에 대한 단편이 많다. 운 없게도 존 치버의 다른 단편집 <기괴한 라디오>도 읽었다. 절벽에 세워진 집에서 어머니와 어른이 된 형제들과 벌이는 이야기가 여러 편에서 나온다. 가까운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 단순한 인사나 행동만으로도 두 개 세 개를 읽어내 서로 다치는 묘사가 좋다. 


연보를 좀 더 살펴보면 레이먼드 카버와 친구라고 나와있다. 김연수가 번역한 <대성당>의 그 카버이다. 이로써 카버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 이 소설의 가장 유익했던 점이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클레어의 어머니가 존 치버 이후로는 소설을 안 읽는다고 했을 때 그가 궁금했었다. 클레어의 어머니는 부유한 지주의 소유자였다. 당당하고 똑똑했으며 끝까지 딸 클레어를 밀어주었다. 클레어의 남편이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그보다 자신의 딸이 훨씬 뛰어난 사람이라고 믿는다. 이런 그녀가 존 치버를 좋아했을리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라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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