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때 내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와 한 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 달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아니라 다른 이와 한 조가 되었더라도 잘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 있는 대다수는 베테랑이었으니까. 대부분 베테랑 대 베테랑이 한 조가 되었지만, 나처럼 왕초보를 만나 가르치는 것도 괜찮았을리라 생각한다. 그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한 조였더라면 이 한 달을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운동을 가르치기도 전에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척척 넘어갔고, 울퉁불퉁하게 넘어간 조는 내가 있던 조를 비롯해 몇 개 되지 않았다. 한 조라는 것을 해보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었는지, 나는 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아는 것이 없는 사람과..
그는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버스 티켓을 손에 들고 흰색이 섞인 갈색 머리가 단정했다. 앞에 다른 버스가 밀려서 서울행 버스는 원래 정차하던 곳보다 좀 뒤에 서 있었는데, 그는 깡뚱한 짐을 들고 일찌감치 버스에 첫 번째로 줄을 만들었다. 여러모로 준비된 사람이었다. 가장 먼저 버스에 탔던 것이다. 나는 정류장에서 좀 더 기다릴까 하다가, 사람들이 그리 움직이기 시작해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버스에 올라 티켓을 스캔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검표가 되지 않았다. 티켓을 다시 확인하세요 라는 안내 메시지가 나왔다. 버스 기사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티켓을 다시 확인하라잖아요. 확인해 보세요. 안내 메시지를 그대로 읊었다.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버스 기사 옆으로 좀 ..
오랜만에 집에 갔다. 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집에도 가고 싶었지만 고속버스를 타고 싶었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을 가는 버스는 즐거운 데가 있다. 너무 오래 타는 것은 아니고, 잠이 잘오고, 무엇보다 남에게 내 여정을 맡기고 마음껏 게을러도 된다는 게 좋다. 그 시간만은 달콤하게 자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버스 안에서 풍경을 보는 일도 좋다. 충분히 잘 보이지만 가깝지 않은 풍경들. 보고는 있지만 내가 영향을 받거나 관여하지 않는 계절들. 머무르지 않고 비껴 나가는 순간을 좋아한다. 놓친 것은 버스 탓으로 돌리면 된다. 버스가 너무 빨라서 알 수 없었어. 하지만 알 수 없어서 좋은 게 있다. 아직 조금도 춥지 않아서 가을이 한가득이었다. 풍경을 보다가 졸다가 버스에서 내렸다. 오랫동안 이런..
10월도 어느덧 중순, 첫 주에는 허리가 아파서 일상에 많이 지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며 자기 전마다 허리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일하다가도 틈틈히 일어나 스트레칭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새로 찾은 루틴이다. 운동이 적어져서 새로운 운동을 해야하는데, 한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간다. 수영을 주 3회 한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어서 주말에 수영장을 나가고 있다. 엊그제 수영은 정말 행복했다. 일요일 오전의 수영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이렇게 햇빛이 좋은 날은 더더욱 없다. 한 레인에 두 명이나 세 명쯤 돌 뿐이고, 그마저도 겹치지 않게 운동한다. 다들 체력이 부족한 것인지. 유유자적하는 수영을 하다 왔다. 스스로에게 풍족한 수영이었다. 글라이딩 하는..
산에 다녀왔다. 그곳을 아는 이라면 그건 산도 아니지, 라고 말할 수 있는 곳에. 산이라고 하기는 좀 그러니까 동네라는 말을 붙여본다. 동네산.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의 동네산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간단히 그저 산이라고 하자. 그래야 다녀온 보람이 배가 되니까. 산에 다녀오셨군요?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싶다. 이름을 궁금해 할 것이고, 무엇이 보이는지 궁금해 할 것이고, 듣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산을 생각할 것이다. 그 사이 이 산의 정체가 드러난다. 여긴 높지 않지만 그곳에 올라가면 주변의 다른 산이 잘 보여서 여기도 산이라는 '느낌'을 준다. 올라가는데 고만한 힘이 들고 내려오는 기분도 제법 좋다. 산에 가면 여러 사람이 있다. 혼자 온 사람들, 둘이 온 사람들, 여럿이 온 사람들. 외..
얼마 전 일기에 발끝으로 수영장 턱을 미는 일에 대해서 드디어 알게 되었다고 썼다. 이런 날이 오다니. 간절하게 바라거나 그것을 위한 연습을 따로 한 것은 아니다. 하다보니 되었다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질투나는 대답을 해본다. 6년 수영했으면 그럴만도 하다... 시간이 굉장히 걸리기는 했지만 발가락으로 턱을 쥐고 있다가 힘껏 밀어서 앞으로 쏟아지는 자세를 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절벽을 밀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지? 이제는 자연스럽게 벽을 밀며 목표했던 곳으로 떨어진다. 어떻게 갑자기 할 수 있게 된 걸까? 물론 갑자기라고 하기에 6년은 어울리는 시간은 아니다. 그동안은 그저 잘 지지하고 있다가 안전하게 뛰어내리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확실하게 민다는 느낌, 벽을 밀고 앞으로..
로지폴소나무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타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이 꺼진 후 새로운 싹이 자라기 때문이다. 캐스케이드산맥 숲의 긴 역사 동안 로지폴소나무가 그 풍경에서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한 가지 방법은 산불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산림청의 산불 금지 방침은 로지폴 숲에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그것은 나이 들도록 사는 것이다. 불과 함께 신속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대신에, 캐스케이드산맥 동부의 로지폴소나무는 점차 성장해간다. 그리고 로지폴소나무가 다 자라게 되면 점차 송이버섯과 더 많이 만나게 된다. 곰팡이는 숲의 천이에서 까다롭다. 어떤 곰팡이들은 새로운 나무와 재빨리 관계를 수립하지만, 다른 곰팡이들이 장악하기 전에 숲이 성장하도록 놓아둔다. 송이버섯은 중간 천이 계열의 곰팡이..
언멧을 야금야금 보고 있다. 주인공은 뇌외과 의사. 기억상실로 하루의 기억만 할 수 있다. 즉, 다음날 일어나면 이전까지의 기억을 잊는다. 매일이 막막할 것 같지만 그에겐 그럴 틈이 없다. 왜냐면 그 하루가 그에게 인생이니까. 다행히 사고 이전의 기억은 있다. 사고 이후의 기억부터 어제까지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그러니까 그의 기억은 사고난 시점(비교적 최근으로 나온다)까지는 존재한다. 그래서 살아가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문제는 매우 크고 막막해진다. 드라마의 특징1. 주인공이 밥을 아주 맛있게 먹는다먹는 연기를 아주 잘한다. 아주 잘 먹어서 무엇을 먹는지 궁금하고 나도 먹고 싶어지게 만든다. 잘 먹는다는 건 잘 살아가겠다는 의지인 지도 몰라. 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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