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에서 미술품을 수집하고 경매하는 메들린. 그녀는 우아하고 똑똑하며 다정하다. 메들린은 조지라는 남자를 만나는데, 이들의 만남은 운명적으로 그려지지만 그 그림은 오분만에 끝난다. 별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영화의 초점은 엉망진창인 조지네 집이다. 이들은 만난지 일주일만에 결혼한 후 육개월 만에 조지네 집으로 '어쩔 수 없이' 잠시 내려오는데 조지가 고향집을 너무 사랑한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고, 메들린의 일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조지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것. 부부는 계약을 성사시킬 겸 겸사 겸사 내려온다. 오랜만에 집에 오는 큰아들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엄마가 있다. 그 옆에는 평소에 읽지도 않는 신문을 보는 조지의 동생 조니. 이 집에는 다정함이라는 게 없다. 짜증과 ..
불어서 내는 악기가 있다. 소리 내는데 별로 힘이 들이 않는 것들. 리코더 같은 것 말이다. 쉽고 흔해서 계이름을 악보를 떠나기가 얼마나 쉬웠는지. 제풀에 지쳐서 그만 두기도 쉬웠다. 숨을 불어넣으면 된다. 후후 내뱉는대로 지치지 않고 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에 지겨움 같은 게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전에 살던 앞집의 아이도 그걸 알았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아프게 잡아야만 소리를 내는 악기가 있다. 기타 같은 것. 아주 대중적인 악기지만 소리내는 것은 자주 들리는 것만큼 쉽지 않다. 기타를 잡으며 손가락이 깊게 아파 본 사람은 좀처럼 늘지 않는 같은 또렷한 F를 내지 않는 음계의 익숙함을 지겨워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호 부는대로 소리를 내는 앞의 악기와는 달리, 깊게 눌린 만큼 쉽게..
롯데시네마 2017년 2월 봄.'벅차다'는 소중한 감정. 2017.2월 봄 좋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적어도 하루, 그 영화만 생각하고 싶다. 2016년 겨울 봄 그림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이러한 시공간은 바로 마술의 세계, 즉 모든 것이 그 안에서 반복되고 모든 것이 그 안에서 하나의 의미로 충만한 콘텍스트에 참여하는 세계다. 그와 같은 세계는 역사적 선형성의 세계, 즉 그 안에서는 어떤 것도 반복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를 지니는 그런 선형성의 세계와 구조적으로 구분된다. 예를 들면, 역사적 세계에서는 해가 뜨는 일출이 수탉의 울음소리의 원인이지만, 마술적 세계에서는 일출이 곧 수탉 울음소리를 의미하고, 수탉 울음소리가 또한 일출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림의 의미는 이처럼 마술적이다. 우리는 ..
이제는 널리 알려진 한 논문에서 캐서린 헤일즈는 인지적 주의력은 서로 구분되는 두 가지 방식에 따라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가지 방식 중 하나는 출판된 책 읽기와 관련된 것으로 '깊은 주의력'이라고 명명된다. 다른 하나는 비디오 게임이나 네트워크와 관련된 것으로 '과민한 주의력'이라고 명명된다. 학생들과 함께 진행된 연구에 근거를 두고 헤일즈는 이 연구에서 세대 고유의 인지적 급변을 본다. 즉 과민한 주의력이 발달되고 깊은 주의력은 손상을 입고 있다. 그는 이 변이를 평가하지 않고, 각 방식의 장점과 한계를 인정한다. 역시 유명한 한 회의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우리 시대가 인쇄물에서 네트워크로의 이행을 특징으로 하며, 포스트-휴머니즘으로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한 세계의 지양과 종말을 ..
어쩌다 책이 팔리면 택배 기사님은 가볍고 작은 종이, 을 주고 가신다. 보통에는 전혀 눈여겨 보지 않는데 어쩌다가 무슨 면 무슨 리가 보이면 주소를 다 읽는다. 동네 이름을 하루 정도 기억해 둔다. '산북면'이라든가. 전혀 알지 못했던 동네 이름을 몇 번 말해본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주소들. '부재시 항아리 위에 올려주세요'를 적는 이도 있다. 오늘은 이렇게 눈이 왔는데, 푹푹 쌓였는데 산북면에는 해가 어떻게 들까. 소포를 머리에 종종 이는 항아리는 얼마나 둥글까. 그 항아리가 있는 집은 어떤 모양일까. 혹시 마당에 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산북면의 곧게 서 있는 나무들 기울어지는 그림자, 개와 항아리와 택배상자를 잇는 공간의 모양. 개가 짖고, 그곳에 내가 보던 책이 가고 있다. 책을 팔..
여자의 입에는 볼까지 긴 흉터가 있다. 어깨에 닿는 파마머리. 여자는 소파에 앉아 곤로를 쬐고 있다. 곤로 위에는 주전자가 끓고 있었고 팔십 가까이 된 여자는 언제 다가와 주전자 뚜껑을 열더니 어디서 가져온 황동의 도시락을 얹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훤히 보이는 도시락. 주전자의 김이 올라오고 도시락이 데워질 것이었다. 어느새 1시를 다해가가고 있어, 나는 그만 모르게 배고프다. 말해버렸다. 계약서를 쓰는 여자는 귀밑에 닿는 파마머리. 배가 고파? 저 냉장고에 빵있어. 여다 데워줄게. 하시자 팔십이 가까이 된 여자는 굽어서 또 어느새 냉장고를 다녀왔다. 곤로 위의 주전자와 도시락은 어느새 치워지고 누런 식빵이 척척척 곤로 위에 얹어지는데, 나는 좋은 눈으로 그 식빵의 구석에 점점이 퍼런 곰팡이가 들..
1. 지나온 곳에는 그런 말이 있다. 나만 알아챌 수 있는 부끄러움과 나만이 모르는 척 지나갈 수 있는 부끄러움이. 2. 먹고자 하기를, 먹고자 하는 일이 많기를. 먹고 싶은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적을 수 있기를. 탐욕을 너에게는 거짓말 하지 않기를. 3. 작년의 어느 날과 비교했을 때. 나는 마침내 의자에 앉아서 이 창을 바라볼 수도 있게도 되었다. 한 문장과 한 문장을 만들었다. 하나 하고 둘이라고 생각의 순서를 붙여주었다. 4. 매일 쓸 것이다. 5. 이곳에서 몇 년 살았고, 이제 강이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 이 동네는 참으로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매양 부서지는 빌라와 건너편의 꺼지지 않는 편의점 불빛, 인구에 비해 밀집한 미용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군데도 맘놓고 다닐 곳이 없는 지경은 ..
에버랜드는 낡고 헤지는 것을 버릴 수 없어 움켜쥐고 있는 거인 같았다. 그는 십수년간 일정한 행복을 짓느라 지친 것 같다. 원래라면 멋진 옷을 입고 춤을 춰야 하는데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쥐고 있다. 바지춤은 왜 흘러내리는가. 중력 때문이다. 중력을 이길 수 없는 화려한 여러가지 사인의 바지의 무거움과, 그 안에 가려진 다리의 앙상함과, 그걸 쥐어올리는 손목의 쇠약함 때문이다. 이 세계도 지고 있다. 보았지만 못본 척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은 것처럼 거인의 표정은 너무 멀어 볼 수 없다. 멋진 브랜드의 로고가 꼼꼼히 자수 놓아졌지만 곧 벗겨지고 말 이 바지는 데님의 새로우면서도, 고루한 냄새가 풍겼다. 시작된 이상 멈출 수 없는 롤러코스터의 상승과 하강, 계산된 부침은 흘러내리고, 다시 추켜 올리는 거인의 ..
녹색이 가득한 곳에 해가 지고 있다. 의 공연이 중반쯤, 지금은 좀 시들해진 락페에서였다. 조용하게 울리는 노래가 한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나는 지루해지고 있었다. 끝났으면, 싶은 공연은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지치지 않았다. 어디로 퍼져가는지 모를 노래는 그 좋은 가사조차 들리지 않고, 속삭이듯 곁에서 들렸던 파스텔 톤의 목소리가 이제 그만 집에 가겠다고 말 했으면 했다. 그러기 전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노래에는 영원히 '라이브'가 필요하지 않다. 어떤 노래는 그 노래를 들었던 MP3, 스트리밍의 날들로 완성된다. 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원작자와 내가 동시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일은 아주 옛날의 것이 되었다. 이 노래는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시작이 좋다. 그건 결국 한 사랑을 기억..
베낀 허수경 구름을 베낀 달달을 베낀 과일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버린 저녁의 어린 날개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베꼈다별은 사랑을 베끼고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영원한 이별을 베꼈고오늘 아침 국 속에서 붉은 혁명의 역사는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물에 든 고요를 베낀 밤하늘밤하늘을 베낀박쥐는 가을의 잠에 들어와 꿈을 베꼈고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그 안에 서서 너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군인가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은 누구인가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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