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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허수경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버린 저녁의 어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
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
영원한 이별을 베꼈고
오늘 아침 국 속에서 붉은 혁명의 역사는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든 고요를 베낀 밤하늘
밤하늘을 베낀
박쥐는 가을의 잠에 들어와 꿈을 베꼈고
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
그 안에 서서 너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군인가
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은 누구인가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후레쉬를 갖고 밤하늘을 논 적이 있다. 시골의 밤은 깜깜하고 고작한 빛이 밤을 뚫고 멀리 갈 수도 없었는데, 나는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처럼 빛이 저 먼 곳을 비쳐줄 수 있을 줄 알았다가 적잖이 실망했다. 처음에는 후레쉬가 너무 작은가하며 이리저리 뜯어 보았지만 우리집에서 가장 큰 건전지가 들어가는데. 이것보다 큰 후레쉬는 상상할 수 없었다. 후레쉬에는 고무패킹으로 씌워진 전원이 있었다. 그걸 딸깍하고 누르는 게 좋았다. 그러면 무슨 큰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듯 전원에 비장한 모양으로 쐐기가 걸렸고, 그러자마자 밝은 빛을 저 앞까지 쏘았기 때문이다. 그땐 이런 후레쉬가 두 세개 집에 있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이용하려고 구비해 두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당시 우리들은 밤에 바깥을 나가기 위해 꼭 지참해야 했다. 아니, 그러기 위해 생겨난 물건 같았다.
바깥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현관문을 열고, 삼십보는 걸어가야 나오는 화장실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다시 열고 그 안에 홀로 들어가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나. 그 어린 날 우리는 화장실에 가려면 문을 두 개는 열고 닫아야 한다는 것. 이 문들이란 누군가가 열어주지 않으며 꼭,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밤중에 잘 놀다가 여덟시고 아홉시고, 열한시에는 잤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열시라도 화장실에 가야한다고 누구 한 명이 말하면 오래된 약속을 지킨다는 듯 모두 일어나 현관께 있는 후레쉬를 챙기고 저마다의 신을 신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화장실을 셋이서 같이 다녔는데, 그건 볼일을 보는 사람은 안에 들어가고나면 바깥에서 오도카니 기다리는 사람이 또 무서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우리는 집에서 화장실 사이에 바둑돌 처럼 놓여 집과 화장실의 어둠을 사이를 연결했다. 시골의 밤은 그정도로 어두웠는데, 이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화장실 주위에 서 있는 나무들의 그림자, 어둠을 한 겹 더 뒤집어 쓰고 있는 뭐라고 표현 할 수 없는 색이었다. 어둠에 곧잘 익숙해지는 어린 눈은 금새 주변을 깜빡이며 밤 보다 더 어두운 모양으로 내가 쪼그려 앉은 곳의 땅바닥을 살살 햝는, 바람 따라 움직이는 감나무, 앵두나무의 말하기 어려운 무서운 잎을 볼 수도 있었다.
살근한 부모라도 화장실에 가주는 일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정도의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우르르 화장실을 함께 가면, 주무시려는 찰나에 나와서 왜 어렵게 밤에 화장실을 가냐,는 등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씀만 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작은 지청구는 작은 지청구, 우리는 씩씩하게 집을 나왔다. 밤에 마려운걸 어떡해요! 라는 말은 하나마나한 대답도 몇 번 하다가 말았다. 속으로는 우리끼리 가면 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꽤 의연하게 집을 나오는 사이 우리에겐 설명할 수 없는 비밀 같은 것이 생겨났다. 우리는 누구도 누가 밤에 화장실을 혼자 못가서 내가 가 주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는데, 우리는 명백히 알고 있는 것이라도 모르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는 화장실이 가르쳐준 윤리였다. 화장실을 함께 간다는 건 뒤를 봐준다는 것. 화장실 안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안에서는 종종 한 두마디씩을 물었는데, 그건 바깥에 당연히 있을것으로 생각되지만 대답을 들어야만 안심할 수 있는 목소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잘 있을 안부를 '잘 있어?' 하는 식으로 묻는다거나, 깜깜해서 뭐가 보이지 않을 어둠에 대고 뭐가 보이냐고 묻는 식이었다. 바깥에 앉아 있을때면 어둠이 익숙해 질 쯤에는 두런두런 이런 저런 얘기를 놓았을텐데, 아. 그것까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날은 후레쉬로 밤하늘을 놀았던 것이다. 멀리 있는 별을 보여줬으면, 하는 맘으로 하늘에 대고 후레쉬를 이리저리 비춰도 보이는 건 별게 없었다. 그런데 무심코, 한줄기라고 불러도 좋을 노란 빛이 나와 멀지 않는 하늘에서 휙 하고 움직인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놀래서 후레쉬를 다시 아까한 모양으로 움직였다. 또 걸렸다. 한줄기라고 부를 수 있는 선명한 빛이. 그때, 동생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것 좀 보라며 다시 후레쉬를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우리는 화장실과 집 사이에 작은 빨래처럼 걸려서 후레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줄기 빛이 쏜살같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열 번쯤 했을까. 그건 없었던 빛이 아니라 집 앞 감나무에 걸려 저쪽 전신주로 이어지는 까만 전선이었다. 후레쉬를 느리게 움직이면, 빛은 전선을 느리게 타며 움직였다. 별의 움직임이라고 믿었던 빛은 실은 내가 움직이는 속도로 타고 흐르던 전선이었다.
허탈했다가도 다시 의기양양해져서, 별을 발명한 듯 느리게 느리게 빠르게 빠르게 후레쉬를 전선에 비추다가 들어왔다. 이제껏 잘 보이지고 않고, 별볼일 없이 얼기설기 걸려 있던 전선이 밤에는, 그 후레쉬를 비추면, 화려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우리는 셋이 저마다 서있거나 앉아서 또 별 생각없이 후레쉬로 다 함께 전선을 따라가는 일을 했는데, 뭐랄까.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삶을 대하는 은유같다.
밤하늘에 보이는 별빛은 지금의 빛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빛이라는 사실은, 별에 대한 어떤 시보다 더 아름답다. 빛이 저 멀리서 내 눈에 맺히기 까지는 빛이 참 대단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도. 모두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후레쉬로 하늘을 비추던 그날에 알았다고 해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후레쉬를 키고 밤하늘을 비쳐도 별을 비출 수는 없었다. 후레쉬는 별이 아니니까. 신이 태양만한 후레쉬를 들고 있었다면 좀 다른 이야기였겠지만. 그러나 나는 내 앞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검은 색 전선을, 한줄기, 별처럼 빠르게, 느리게 비추며 움직였다. 그건 어떤 대단한 발견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함께 나가면서 발견했던 일이다.
그날 이후로 이십년도 더 지난 지금, 밤중에 화장실을 함께 가는 일은 없다. 밤중이라는 것은 혼자서 감당해도 좋을 일이 되었다. 사실 셋보다 아무도 없는 밤이 필요해서 서로 나가기도 한다. 동생들이 저마다의 밤을 위해 나간 지금, 나는 이십세기에 멸종했을 것 같은 단어를 발견해 한 바닥을 쓰지만, 이제는 후레쉬가 뭔지도 모르겠고, 그걸 딸깍하고 키는 기쁨도 모르겠다. 그건 어린 나의 것. 지금의 내가 어떻게 가져올 수 없는 것. 일상은 아스팔트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바퀴를 굴리고 있다. 이 차들이 다 지나고 나면, 나는 언제쯤 나의 까망과, 나에게 녹아든 돌과 그 틈에서 포기포기 나는 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텐데. 그러다 보면 거미줄 같이 늘어져 있는 비루한 전선을 다른 것으로 바꿔내는 마술을 볼 수 도 있을 것 같은데. 몇 번을 고쳐도 마음껏 나오지 않는 글 마지막을 고치고, 고치고, 내일도 고치고, 그러니까 내일까지 한 번더 고쳐봐야지 한다. 어린 날의 내가 크레파스로 벽에 그림을 그리다가, 혼나고, 또 혼나도 그 옆에다가 그리고, 밤중이 되면 우르르 다함께 화장실을 가서 움직이지 않는 조그마한 돌처럼 놓여서 세상에 처음 뱉었을 말을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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