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색으로 화려한 잡지로 편지봉투를 백개쯤 만들고 싶었다. 봉투만 만들고 싶었다. 예쁘지만 다 다른 색깔의 편지 봉투를. 그 안에 들어갈 편지는 글자가 아니다. 편지봉투를 접는 손길이다. 나는 잡지를 한 장씩 뜯어 금을 네 개에서 여덟 개, 아주 신중이 긋고, 그 선마다 손톱으로 두 번씩 줄을 다듬는다. 풀로 귀퉁이를 잘 붙이고 말린다. 봉투 여닫는 방법은 다 다르게 할 것이다. 하지만 백개쯤 만든다면 그 안에서 반복되는 몇 개의 패턴을 찾을 수도 있게 된다. 그 패턴은 온점이다. 그게 하나의 문장이라면 나는 몇개의 문장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편지봉투를 만들고 싶었는데 편지를 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편지봉투를 만드는 일로 편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한 장의 편지봉투도 만들지 않았다...
세계지도의 비밀이 풀렸다. 그것은 고양이. 한때 세기의 비밀인듯 각국이 치열하게 업데이트했던 지도는, 이제 격자로 짜여진 지도안에 실제로 산다는 것을 잊고 싶은 인간들에게 유머를 주는 납작한 그림이 되어버렸다. 이미 모두에게 알려진 정보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쉽게 그림판으로 불려진다. 웹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이세상에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에 을 말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지리'라는 고루한 개념은 산이나 바다, 국경을 말하는 것 이상이다. 더 작게 분화되어 이제 개인의 생활반경을 탐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이쯤되면 '지리'가 아니라 '보안', '개인정보'등의 말이 더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쯤 말해야 지리가 당신의 생활에 끼치는 영향으로서 지리를 진지하게 받아들..
상식처럼, 우리는 1+1이 무엇인지 안다고 대답하지만, 안다는 지점을 좀 더 넓혀 1+1이 그 대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염두하지 않는다. 우리는 1+1의 값이 2와 같다고 말하지만, 이건 1+1과 2도 과연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은, '바라보는 이들'의 기호이며 약속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1+1과 2같은 것 대신 유영과 주혁을 보내 '안다'는 것을 얇게 쪼갠다.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 일방적인 발화라는 점을 부디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이야기 한다. 아는 것에 익숙하며 그것을 말하는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 여러명 나와 유영을 안다며 말을 건다. 그들에겐 유영이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는 상관없다. 왜냐면 내가 당신을 아주 잘 알고, 당신은 이렇게 예쁘고, 그때 나와..
아이유는 예술가가 되었다 보라색을 좋아하고 또 뭐더라. 이러는데도 노래가 된다. 25살이라는 제 나이를 계속 말하는 것만으로 노래가 되는데. 그래서 이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노래를 듣고 좋아하는 이들을 어쩔 수는 없다. 너무 많다. 이제 아이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가 됐다. 더이상 3단 고음을 내지 않아도, 옛노래를 커버하지 않아도, 오빠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 예술가가 된거지. 아이유, 25살에 말이다. 달려라 토끼 이런 소설은 폭력같다...그렇다. 여자는 무기력하고 뻔뻔하면서 자존감도 없게 그려지고, 남자는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 그걸 보고 측은해 하기라도 해야하는 건가. 문장이 속도감 있고 잘 썼지만 그런 문장으로 이런 내용을 이렇게 길게 쓴다는 것..
아버지는 '몸'에서부터 시작하고나는 저만치 '목소리'로 물러나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이야기의 입을 뗀다. 아버지 얘기는 '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건 몸이 그를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다리를 절었단다' 그는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유공자가 된다. 유공자란, 국가가 몸을 뺏아간 대신 주는 증표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뭔가 불리한 일이 있을 때, (그건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유공자증을 내밀며 선처를 요구하거나, 혹은 존경을 요구하거나, 그래서 자신의 일을 '정당'한 것으로 혹은 모른척 넘어가 주길 바라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그런것을 극복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실패한 인간이 될 확률은 적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 나더라도 '..
그래서 그랬다 임솔아 살구꽃은 무섭다. 하루아침에 새까매진다. 가로등아래서 살점처럼 시뻘겠는데.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보다 무섭다. 유리컵속에 가둔 말벌이 죽지는 않고 죽어만 간다. 잠그지 않는 가스밸브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내가무섭다. 아무도 없어서 무섭고 누군가 있을까 봐 더무섭다. 엄마한테 할 말 없니 엄마의 그 말이 내 말문을 닫는다. 할 말이 없어서 무섭고 할 말이 생길까 봐 더 무섭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때와 같이 무서워하던것들이 시원하게 풀려나간다. 눈물도 안 나던 순간에 눈물이 갑자기 끝나는 순간에 무섭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에 한 번도 믿어보질 못해서 쉽게 믿어버릴까 봐서 술 취한 친구의 눈빛과 술 안 취한 친구의 눈빛과 그래서 그랬다는 말과 아빠의 검지가 무섭다. 한 마디만..
사랑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구분한다. 잘 한다. 앞으로 더 잘하게 될 것이다. 17. 3
내 자리에는 말라버린 꽃과 초강력 딱풀과 한쪽이 끊어져 고무줄 튀어나온 머리끈, happy? 라고 묻는 정사각형 카드, 그리고 남해 바다가 보이는 엽서가 한 장 있다. 가장 이상한 것은 happy? 라고 묻는 정사각형 카드다. 흰색 마분지, 깔끔하고 가느다란 서체의 안쪽을 열면 '우리는 단지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 라며 고객센터를 적어놓았다. 마우스 패키징 중에 하나였다. 피식 웃으며 빼놓았던 기억이다. 마음이 뭍어버리면 버릴 수가 없다. 물건의 사용 설명서가 점점 필요 없어지는 요즘 예전의 두껍던 설명서는 몇장의 카드로 남아 그마져도 버리기 쉽게 되어 있다. 점점 더 정교해지는 물건에 점점 더 간소화 되는 설명서는 무슨 뜻일까. 사용도가 높은 물건일수록 그런 것 같다. 그것을 가장 빨리, 잘 익히..
꿈에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는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어서 조금 슬펐고, 아프지는 않았지만 잠에 드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알 수 있었다. 힘을 다해 죽기 전까지 나는 무엇을 썼는데, 그건 정신이 나갈듯 말듯한 상황에서 겨우 머리속에 떠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마음은 편지였지만 내용을 갖추기 전에 끝나 버리는 메세지에 가까웠고 두 줄을 넘지 못했다.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끝까지 쓰려고 노력했다. 쓰면서 들었던 한 가지 걱정은 이걸 발견하지 못하면 어쩌지였다. 나는 곧 죽어서 이게 여기 쓰여있다고 말하지 못할텐데, 그런 생각 뿐이었다. 나를 잘 아는 이가 이걸 발견해줄거라고 생각했고 나머지를 힘내서 썼다. 나는 꿈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죽는다는 느낌이 무..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름, '험윤'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다. 이 이름은 애초에 불리기 어렵게, 자주 불릴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험'이라는 성은 말하자 마자 닫히는데 다시 '윤'이라는 말을 힘들게 발음하고 기다려야 한다. '험윤'이라고 불린 이의 대답을. 그러나 열리지 않는 이름, 다 부르기 위해서는 힘이 드는 이름이란 뭘까. 나는 혹시 독일어 번역을 하는 작가가 독일어 음가를 빌려 만들어낸 이름이 아닌가 추측해 독일어 알파벳을 여러날 살폈으나 풀 수 없었다. 작가는 그 의심을 예상했다는 듯, 그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시끄러울 정도로 이야기를 전한다. 책에는 그의 일상이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하다. 거의 살아 움직일 정도로, 알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정보도 준다. 다음장을 넘어가야 하는 책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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