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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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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봄밤 2017. 6. 11. 22:41






색색으로 화려한 잡지로 편지봉투를 백개쯤 만들고 싶었다. 봉투만 만들고 싶었다. 예쁘지만 다 다른 색깔의 편지 봉투를. 그 안에 들어갈 편지는 글자가 아니다. 편지봉투를 접는 손길이다. 나는 잡지를 한 장씩 뜯어 금을 네 개에서 여덟 개, 아주 신중이 긋고, 그 선마다 손톱으로 두 번씩 줄을 다듬는다. 풀로 귀퉁이를 잘 붙이고 말린다. 봉투 여닫는 방법은 다 다르게 할 것이다. 하지만 백개쯤 만든다면 그 안에서 반복되는 몇 개의 패턴을 찾을 수도 있게 된다. 그 패턴은 온점이다. 그게 하나의 문장이라면 나는 몇개의 문장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편지봉투를 만들고 싶었는데 편지를 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편지봉투를 만드는 일로 편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한 장의 편지봉투도 만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백한개의 편지봉투가 만들어졌다가 다시 치워졌다. 백개를 만들고 나서야 완성될 문장, 나는 그 몇 문장도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여기까지 쓰고 목이 메인다.


칠리새우를 만들었다. 새우를 사서 요리 해 본 것은 처음이다. 자숙새우인가를 샀어야 했는데 없어서 칵테일 새우를 샀고, 자잘한 새우를 한컵 채워서 양념과 볶았다. 나중에 그 컵을 물로 헹구고, 다시 물을 넣어 먹으려고 했을 때 비린내가 이렇게 끼쳐와서 컵을 내려놓았다. 접시에 담긴 칠리새우에는 온통 새콤달콤한 맛만 났었다. 동생들은 과자같다고 했다. 요 며칠 음식을 만들어 먹는데, 만들고 나면 먹고 싶지가 않다. 대패삼겹살두부조림, 된장찌개, 소세지야채볶음, 두부참치스테이크, 하이라이스, 칠리새우. 아! 토마토계란볶음도 해먹었다. 


저 번주 사이 집주인이 두 번 집에 다녀갔다. 첫 번째에는 부동산 사장님과 함께. 퇴근시간에 맞춰 왔다. 미리 사둔 음료수를 돌아갈 때 드렸다. 두 분 다 좋아하셨다. 멀리 방문해 주셨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했고, 그건 진실이었다. 집을 꾸미고 아마 첫 손님인 것 같다. 

토요일에는 남자와 함께였다. 남편이겠지. 말하자면 이른 시간이었고, 집을 손 볼 줄 아는 전문가를 대동하지 않은데 적잖이 실망했다. 견적을 내러 또 와야 할 것이다. 그녀는 검은 봉투에 들은 방울토마토를 건넸고, 감사히 받았다. 이번에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돌아가고 방울토마토를 씻는데, 바닥에 몇 개가 완전히 썩어 있었다. 플라스틱 박스에 두 개였는데, 다른 한 박스는 괜찮았다. 동생은 먹지 않았다. 토마토를 싫어한다고 했다. 


옥상을 역시나 둘러보고는, 부분만 수리해서는 안될 것을 둘 다 직감한 듯 했다. 갈라진 부분에 시멘트를 바르고 실리콘 작업을 해주겠다는 말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마음이었다. 비는 그렇게 내리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을 했다가는 또 비는 벽을 타고 내려올 것이다. 그렇게 몇 해를 간신히 견디고 부서지기를 바라는 심정을 이해할 수 없지는 않았지만. 


옥상의 한 쪽에는 작은 창고가 있는데 몇 세대에 걸친 쓰레기가 들어있다. 쓰는 사람도 없고 쓸 만한 것도 없으니 그렇게 불러도 될 것 같다. 그 중에는 도구들도 있었는데, 대야나, 삽 같은 거였다. 남자는 헤실거리면서 혹시 아느냐며 창고 어딘가를 파보면 뼈가 나올지. 그런 얘기를 집주인과 농담이라고 했다. 여자는 인상을 썼다. 햇빛이 옥상까지 올라온 담쟁이 넝쿨의 초록과 자꾸 부딛혔다. 나는 그런 걸 보면서 슬리퍼를 신은 한쪽, 또 다른 한쪽 발에 힘을 주며 서 있었다. 재수없는 말이었다. 나의 말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 그가 한 말이 악의가 아니었음을 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그가 화를 낸다면, 그의 말에 


악의가 있었다고 고백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생각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의 바닥께는 백이십일겹쯤으로 자잘하게 세로로 부서져 작게 너덜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방문에서 집주인은 원래 그러냐고 물었다. 원래 그랬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원래'라니, 이 집의 약 삼십 몇 년전의 모습이다. 그걸 나에게 묻다니. 당신도 모르는 것을. 


풍경을 사왔다. 베트남에서 만들어진 대나무 풍경이다. 나무의 청량한 소리가 나서 열 댓번 소리를 듣다가 사왔다. 소리가 좋아서 석이랑 몇 번이나 풍경 앞에 있었다. 이런 걸 사갈 사람은 우리 밖에 없어보였다. 석이는 좋으면 사자고 했다. 나는 그때 조금 즐거웠다. 집에 돌아와 소리를 들어보는데 아까 같은 청량한 소리가 아니었다. 집 베란다에 메달아 두었다. 바람이 없는지 스스로 소리를 내는 일이 없다. 괜히 베란다 물건을 가지러 가며 풍경에 부딪힌다. 둔탁한 소리가 조금. 소리가 나지 않는 풍경. 


장 주네의 <도둑 일기>를 읽고 있다. 


내 형태가 다 어그러져가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입과 내가 없어져야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렇게 만든 사랑은 그들의 아주 연약한 바깥이다. 부서지기 쉽지만 그것도 없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싸구려 비누방울을 자꾸 불고, 숨이 차고, 그걸 보는 아름다운 시간은 너무나 짧고, 비누방울은 사라지지만 다시 몽글몽글 불고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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