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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름, '험윤'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다. 이 이름은 애초에 불리기 어렵게, 자주 불릴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험'이라는 성은 말하자 마자 닫히는데 다시 '윤'이라는 말을 힘들게 발음하고 기다려야 한다. '험윤'이라고 불린 이의 대답을. 그러나 열리지 않는 이름, 다 부르기 위해서는 힘이 드는 이름이란 뭘까.
나는 혹시 독일어 번역을 하는 작가가 독일어 음가를 빌려 만들어낸 이름이 아닌가 추측해 독일어 알파벳을 여러날 살폈으나 풀 수 없었다. 작가는 그 의심을 예상했다는 듯, 그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시끄러울 정도로 이야기를 전한다.
책에는 그의 일상이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하다. 거의 살아 움직일 정도로, 알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정보도 준다. 다음장을 넘어가야 하는 책의 속성상, 불가피하게 나는 험윤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보는 이가 되어 아침에 조깅을 하거나 커피를 천천히 내리는 사람을 한 명 알게 된다. 지켜본 결과, 그의 일상에는 노이즈가 없다. 거의 완전히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통제한다. 그게 바로 그가 아주 자세하지만 실제로는 있을 것 같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의 일상은 마치 신같다. 아무것도 나를 해롭게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나 제도, 심지어 날씨, 주거 환경등 모두 험윤을 '험윤'으로 있을 수 있게 돕는다. 이것은 험윤이라는 이름만큼 기이하다.
그런 그는 틈틈히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라는 책을 읽는데, 앞의 이유 때문에 나는 그 책까지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밀레나는 책으로도, 실제로도 존재하던 사람이다. 카프카와 편지를 썼던 여자다. 그녀만의 삶이 있을테지만 카프카가 아니면 불리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카프카는 말년에 폐결핵을 아팠고 직업과 결혼등 세상의 여러 행태와 불화했는데 죽기 전, 그녀와 소상히 편지를 썼다. 편지란 무엇인가. 만나지 않는 두 대상의 공간이다. 다치지 않고 간절해 질 수 있는 종이 위의 몇 줄. 험윤은 다큐를 찍는 예술가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커피를 내릴 줄 아는 사람이지만 그의 일상에는 감정을 나누는 타인이란 그림자도 없다. 그는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가장 작은 소리로 서로를 불러내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도 험윤은 내색도 없다. 무엇으로도 흔들리거나, 치우치지 않는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의 존재에 대한 의심도 지쳐갈 무렵 한 사람이 더 나온다. '재단 회의실에서 마주친 안경을 쓴 여비서'. 이 한심한 설명은 한 줄도 되지 않지만 내가 그 얼굴을 생각해 낼 수 있을정도로 구체적이다. 그 사람의 친구를 세 명쯤 생각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 소설에서 이 여자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도 않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으며, 심지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려고도 하지 않는데 그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나, 싶을 무렵 '6개월 인턴직이 오늘로 끝났다'는 등의 역시 무심한 설명만으로 다시 그녀의 일생을 그린다. 그녀는 이렇게 무성의한 설명과 지나가는 듯한 몇 줄의 말미에도 너무나 확실하게 이곳에 존재한다. 끝까지 이름 한번 불리지 않는 여자가, 자신의 밤에 대해서 험윤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한다.
그녀가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할 무렵, 나는 밀레나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카프카에 대한 항목에서도 밀레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나는 아침에 벌레가 된 남자를 생각하며 잠시 어깨를 움추려보았고,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를 읽기로 했다. 밀레나는 나오지 않는다.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쓴 편지가 모여져 있다. 카프카의 말로 말미암아, 그녀의 말을 추측해 볼 수는 있다. 나는 나이브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고 있다 싶었는데 카프카는 카프카였다. 그는 한결 쉬운 말로 섬득하고도 애정어린 세계를 구현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디에나 살아 있었다. 한 사람에게만 보여진다는 점에서 더욱 진솔했고, 나빠지지 않으면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마뱀과 딱정벌레 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으며 늘 같은 곳에서 숨을 참게 된다. 조금 길지만 모두 인용하고 싶다.
지금 저는 두 시간 전에 밖에 있는 눕는 의자에서 부인의 편지를 읽을 때보다 마음이 편안합니다. 제가 거기 누워 있을 때, 제게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딱정벌레 한 마리가 뒤집힌 채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없었지요. 저는 그 녀석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녀석을 도와주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었습니다. 한 발짝 걸어가서 살짝 밀어주는 것만으로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부인의 편지를 읽느라 그 녀석에 대해 잊어버렸습니다.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도마뱀 한 마리가 비로소 다시 제 주위의 삶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켜주었지요. 도마뱀은 우연히 딱정벌레 위로 기어갔습니다. 그 녀석은 이미 완전히 조용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사고가 아니라 죽음의 투쟁이었구나. 동물이 자연사하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어'하고 저는 혼자 생각했지요. 그런데 도마뱀이 그 위로 스르르 지나가면서 그 딱정벌레를 바로 세워주었습니다. 녀석은 아직 잠시 동안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더니만, 곧 다시 당연한 듯이 집 벽을 타고 올라가는 거예요. 어저면 저도 그 일로 인해 다시 조금 용기를 얻어서, 일어나 우유를 마시고는 부인께 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프란츠 K.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中
이무렵 한 권의 책을 더 읽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야 할 것 같다. <타자의 추방>을 읽고 있었다. 나는 험윤과 '재단 회의실에서 마주친 안경을 쓴 여비서'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책을 모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빌려 거칠게 말하자면 험윤과 그녀는 모두 타자를 갖고 있지 않았다.
나를 확인해주고 인정해주는 시선이 사라지고 있다. 안정된 자존감을 갖기 위해 나는 내가 타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며, 타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표사을 필요로 한다. 이런 표상은 불명료할지라도 내가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름 아닌 존재감의 결여가 자기상해의 원인이다. 생채기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오늘날의 성과사회, 최적화 사회에 전형적인 자기처형의 의식일 뿐만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는 비명이기도 하다.
<타자의 추방> 40쪽
밀레나는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카프카가 마음을 다해 부르는 글자 안에만 밀레나는 머문다. 카프카가 밀레나를 그리는 동안, 험윤은 책 한 권을 떨어뜨린다.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 6개월 인턴이 끝난 그녀는 밀레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밀레나가 누군지 몰라요. 나는 밀레나가 아니에요. 설사 밀레나였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몰라요. 아무도 그것을 몰라요. 그렇지만 나를 데려가 주세요. 기나긴 여행이 될 거라고 말했나요? 나는 황홀할 거예요.
'설사 밀레나였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몰라요' 그녀가 데려가 달라는 곳은 재단이 선정한 험윤의 작품의 촬영지다. 사막일 것이고, 2년 쯤의 시간이 걸리고, 사람은 많이 필요하지 않다. 그녀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원래 의미의 시간은 나에게 처음부터 부여되지 않았어요. 내 시간은 그냥 밤뿐이니까요. ....내 시간은 보이지 않고, 불분명하고, 흐릿할 뿐. 가만히 있으면 나는 밤속에서 연기처럼 흩어지고 점점 엷어지다가, 아무도 모르게 완전히 사라질 거예요. ....여기 가만히 있으면 내 밤이 영영 끝나지 않아요.
여배우의 독백처럼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연극적인 말을 건넨다. 연극적이지만 그녀를 수식하는 삶은 연극이 아니다. 그녀의 이런 말에 험윤은 보통 사람처럼 내게 왜이러냐는 반응이다. 그러나 험윤이 이 책을 통틀어 처음 타인의 영향으로 기분이 흔들렸다. 자신만의 작품과, 자신만의 삶에 난입하려는 알지도 못하는 여자. 이야기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을까?
밤에 뭍혀서 원래 무엇이었는지도 모를만큼 사라질 뻔 했던 그녀의 밤을 험윤이 만날 수 있었을까? 나만 만날 수 있는 나의 외로운 괴물. 험윤이 이름자 '윤'으로만 불리게 되고 여비서라거나 6개월 인턴직이라는 볼트 규격 같은 이름이 아닌 진짜 이름으로 만날 수 있다면, 그곳에서 볼 수 있는 나의 아름다운 괴물. 밀레나에게 쓰는 편지로 '밀레나'는 영원히 산단다.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하고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을,<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타자의 추방>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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