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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서 내는 악기가 있다. 소리 내는데 별로 힘이 들이 않는 것들. 리코더 같은 것 말이다. 쉽고 흔해서 계이름을 악보를 떠나기가 얼마나 쉬웠는지. 제풀에 지쳐서 그만 두기도 쉬웠다. 숨을 불어넣으면 된다. 후후 내뱉는대로 지치지 않고 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에 지겨움 같은 게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전에 살던 앞집의 아이도 그걸 알았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아프게 잡아야만 소리를 내는 악기가 있다. 기타 같은 것. 아주 대중적인 악기지만 소리내는 것은 자주 들리는 것만큼 쉽지 않다. 기타를 잡으며 손가락이 깊게 아파 본 사람은 좀처럼 늘지 않는 같은 또렷한 F를 내지 않는 음계의 익숙함을 지겨워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호 부는대로 소리를 내는 앞의 악기와는 달리, 깊게 눌린 만큼 쉽게 놓을수는 없다. 물론 이건 나의 경우로 한정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것에 비해 리코더리스트는 숨어 있는 것을 보면 앞의 설명은 그런대로 타당한 지점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같다. '라'를 불면 ''라'라고 대답하는 것. 쉽고 명쾌한 소리에 왜 빨리 지치는가. 이 매끄러운 연결에 어느날은 매우 깊고, 건널 수 없는 틈 같은걸 보았다. 서늘했다.
첫 번째 알바비를 어떻게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영영 기억할 줄 알았는데, 다만 이렇게 잊어버리고 말 것을 알았는지 엄청난 시간과 바꾼 돈으로 작은 디카를 샀다.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갖고 싶었던 거였다. 나는 사진을 무척 잘 찍을 줄 알았다. 찍기를 즐거워 할 줄 알았다. 대단한 풍경을 생각했다. 디카를 사고 첫 날 집 앞의 꽃이나 풀을 찍었던 기억이 있다.
사진은 흙 속에서 자랐을 그것과 아주 똑같이 나왔다. 그 꽃과 풀 주변의 물방울이나 벌까지도 실제의 그것처럼 찍었다. 분간이 잘 되지않았다. 내 손 앞에 붕붕하고 꽃 주위를 맴도는 벌과 작은 창 안에 벌은 아주 같았다. 사진은 항상 잘 나왔다. 기술의 좋고 더 좋음의 분간은 인간의 눈으로 잘 판명이 안되는 곳에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 '더' 잘 찍기를 그만두었다. 이 '더'의 여부는 내가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거였고, 나의 노력과 별개로 이미 '잘' 되어진 것에 무엇을 올려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사진 찍기란 뭐랄까. 리코더를 부르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찍고 싶은 것을 선택해 찍는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아름다운 것은 너무나 많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운 것과 잘 분간되지 않았다. 그보다 나는 찍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일이 더 어려웠는데, 종내에는 찍고 싶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이 사진을 통해서도 나오는 지 알기 어려웠다.
또한 방금 같은 서술들, 개미굴처럼 구불하게 파고드는 감정의 변화를 사진으로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키보드를 더 좋아했던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건 리코더를 부르는 것과 같다. 기억을 두드리면 'ㄱ'을 칠 수 있다 '기억'을 치고 싶다면 '기억'을 만들면 된다. 'ㅋㅋㅋ..' 한없이 뜻없이 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그건 '기억'을 치는 일과는 다르다. 내게는 이 '틈'을 구분하는 일이 아주 중요했다.
어느날 사진에 대한 아주 얇은 책을 알게 되었다. 그건 어떤 사진이 아름답다고 이야기 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첫 아르바이트와 바꿨던 주먹만한 디카를 어째서 그렇게 일찍 놓아버렸는지 이해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 작은 뷰파인더로 다른 것을 찍어내는 일에 왜 금방 시들했는지 알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손가락을 살짝 누르는 일만으로 다시 아름다움이 복사되는 세상을 기꺼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장치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무뚝뚝한 자동화 속에서 프로그래밍하는지를 관찰하고 있다. 즉 인간의 노동이 어떻게 자동기계(로봇)에게 맡겨지고 사회의 대다수가 '제3차적 영역'에서 공허한 상징과의 유희에 몰두하기 시작하는지를, 사물적 세계에 대한 실존적인 관심이 어떻게 상징의 세계로 전이되고, 사물의 가치어 어떻게 정보로 전이되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우리의 사고, 감정, 소망 그리고 행위가 어떻게 로봇화되는지, '산다는 것'이 어떻게 장치를 먹여 살리고 또 그 장치에 의해 연명하게 되었는지, 간단히 말해서 어떻게 모든 것이 부조리하게 되었는지를 관찰하고 있다.
지겨움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 날들을 보내본 적이 있다. 그건 절망적이었지만 그만큼 나는 그곳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좀처럼 일어나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길게 누워있었다. 나는 이 날들을 자주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말해 본적은 없다. 위로 받을 일도, 늘어짐에 누군가의 동참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이상한 일이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기도 했다.
'산다는 것'에 왜 지겨움이 이다지도 많이 끼어들어갈까. '지겨움'은 나를 넘어선 어떤 것에서 온다. 엄격하거나 너그럽거나, 나를 생각하고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있다. 가만히 있는 것. 그건 '자동화'를 '능동'적으로 밀어내는 일이었다. '거부'한다는 표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기꺼이' 내가 되는 것. 디카로 사진 찍기를 기뻐하지 않았던 것은 그게 나보다 나 '아닌' 것을 더 더해야 가능한 일임을 몇 컷에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풀의 흔들림에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풀이 깜짝 놀랄만큼 쉽게 가져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나라고도, 나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더해 '삶'이 되어진 삶에 대하여. 조화로움을 포기한 나의 능동은 때대로 한 곳에 멈춰서 시들기를 좋아한다. 나에게 시간을 더하는 일은 나만 할 수 있는 일. 나는 틈을 틈으로 남겨두는 일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틈을 모른척 하면서 오가는 일을 나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깊은 틈의 제일 바닥부터 들어가서 감침질 해오는 일에 끝에 함부로 건너갈 수 없었던 곳을 비로소 시작 할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 얇은 사진에 대한 책을 읽은 날 나는 인간이 건너갈 수 없는 틈을 이해하려는 간절함에 대해서 말하는 걸 들었던 것 같다.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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