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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글

그래서 그랬다-임솔아

_봄밤 2017. 3. 28. 00:49


그래서 그랬다


임솔아




 살구꽃은 무섭다. 하루아침에 새까매진다. 가로등

아래서 살점처럼 시뻘겠는데.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보다 무섭다. 유리컵

속에 가둔 말벌이 죽지는 않고 죽어만 간다. 


 잠그지 않는 가스밸브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내가

무섭다. 아무도 없어서 무섭고 누군가 있을까 봐 더

무섭다. 


 엄마한테 할 말 없니

 엄마의 그 말이 내 말문을 닫는다.


 할 말이 없어서 무섭고

 할 말이 생길까 봐 더 무섭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때와 같이 무서워하던

것들이 시원하게 풀려나간다. 눈물도 안 나던 순간

에 눈물이 갑자기 끝나는 순간에 무섭다는 말이 무

색해지는 순간에 한 번도 믿어보질 못해서 쉽게 믿

어버릴까 봐서


 술 취한 친구의 눈빛과 술 안 취한 친구의 눈빛과 

 그래서 그랬다는 말과


 아빠의 검지가 무섭다. 한 마디만 남아서 손톱이 

없어서 손톱이 없는데도 가려운 데를 긁어서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3




씨발. 시를 읽고 거듭 드는 기분은 씨발이다. 이 날 것의 시를 읽고 더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다음 시를 이어 보자. 



석류


 창문은 창밖에 서 있는 나를 보게 한다. 내 허벅지

위로 도로가 나 있고 내 허리 속으로 막차가 도착한

다.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내 가슴 속 빌딩으로 걸

어 들어간다. 가슴에 손을 넣어 창문을 연다. 한 여

자가 화분을 분갈이하고 있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쪼개어진 석류가 식탁에 있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하얗다. 갓난아이가 눈을 움쥔 채 설원 위를 기어

간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내 눈썹에서 가로등이 켜

진다. 내 이마에서 비행기가 지나간다. 몸속에 있던

도시가 몸 밖으로 배어 나온다. 마지막 창문을 열면

창 안에 서서 창문을 세어보는 나를 볼 수 있다. 알

알이 유리가 빛나고 있다. 불을 끄면 창밖에 서 있는

나와 창 안에 서 있는 내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숨막히는 레이어다. 투명하게 하나서부터 열개까지의 레이어가 겹쳐 보인다. 이렇게 선명한 그림을 이렇게 간단한 언어로, 미려하게 그려냈다. 이게 첫 번째 시다. 이쯤은 할 수 있으니 이제부터 날 것을 쏟아내겠어요. 시를 못쓰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라는 포문. 나는 이 시에 깜짝 놀라서 두 권이나 사버렸다. 한 권은 그대로 있고 다른 한 권만 읽고 있다. 


시 <그래서 그랬다>는 한 쪽을 저는 사람처럼 제대로 걷지 못한다. 어딘가 안 맞고, 어딘가 버려지고, 그 와중에 뭘 또 주우러간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다. 시퍼런 눈을 치켜뜨고 아스팔트 위를 지나가는데. 눈빛으로 한 쪽 다리를 지탱하면서 걸음 안 맞고, 버려지고, 그 와중에 꺽꺽거리며 울다가 언제 울었냐는 듯 다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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