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후의 글

인주에 지장

_봄밤 2017. 1. 17. 01:09



여자의 입에는 볼까지 긴 흉터가 있다. 어깨에 닿는 파마머리. 여자는 소파에 앉아 곤로를 쬐고 있다. 곤로 위에는 주전자가 끓고 있었고 팔십 가까이 된 여자는 언제 다가와 주전자 뚜껑을 열더니 어디서 가져온 황동의 도시락을 얹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훤히 보이는 도시락. 주전자의 김이 올라오고 도시락이 데워질 것이었다. 어느새 1시를 다해가가고 있어, 나는 그만 모르게 배고프다. 말해버렸다. 계약서를 쓰는 여자는 귀밑에 닿는 파마머리. 배가 고파? 저 냉장고에 빵있어. 여다 데워줄게. 하시자 팔십이 가까이 된 여자는 굽어서 또 어느새 냉장고를 다녀왔다. 곤로 위의 주전자와 도시락은 어느새 치워지고 누런 식빵이 척척척 곤로 위에 얹어지는데, 나는 좋은 눈으로 그 식빵의 구석에 점점이 퍼런 곰팡이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건 나만 본 모양인지 그러거나 말거나 식빵은 구워지고 있었다. 까슬까슬하게 타기도 하며 먹기 좋은 냄새도 내고 있었는데, 그게 벌써 내 앞으로 두어개 쌓였다. 


네네 하며 먹지 않았다. 어느새 식빵이 곤로의 한바퀴를 두르며 다 익었고, 곰팡이도 끄슬러져 버렸고, 계약서가 얼추 써지고 있었다. 큰 애는 미용실에, 작은 애는 어린이집에. 큰 애가 미용실에 있다고? 계약서를 살피며 탁자 위에 죽 늘어놓던 여자는 그럼 얼른 쓰고 가봐야지, 척척 그 앞에 계약서를 놓았다. 좀전에 여자는 내 인중이 빨간 것을 보고 그 약 있어, 그 약. 하더니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말해도 내가 모르지 않을 약이었고, 나는 여자가 얼른 내 인중을 잊어어버리고 계약서를 열심히 써주기를 바랐다. 접어줄까? 펴줄까. 빨간 인주가 삐져나온 계약서를 들고 물었다. 접어주세요. 여자는 저 인주에 지장을 찍으라고 세 번 말했다. 나는 한사코 싸인했다. 인주는 검고 동그란 플라스틱에 너무 많이 담겨 있었다. 도장으로 여길 꾹 누르며 저쪽이 밀려 올라왔다. 파레트에서 오래 굳히는 물감을 생각했다. 은행이 까다로와서 그러지. 두번 오면 안해준다. 여자는 말했고, 나는 괜찮을거라고 대답했다. 계약서 봉투에 넣는데 여자가 말했다. 그래, 더모베이트. 그 약이 참 잘들어. 십수년만에 듣는 이름이었고 


나는 약간 무너졌다. 이 허름한 부동산, 곧 있으면 은행의 돈과 나의 그동안이 모두 들어갈 저 집이 모두 불안스러워졌다. 그 약을 말하며 아주 좋다고 추천하는 저이의 얼굴과 그 약을 말하며 이 집을 말하는 입이 같았다. 나는 최근의 날들을 모두 다 합한 것만큼 우울하였다. 몇년 전부터 봐왔던 블로그, 한남동 재개발 지역의 40년된 집에 들어가 온통 수리를 마치고 이제는 직업도 바뀐, 책도 몇 권 낸, 어느 이의 집을 보면서 괴롭게 몸을 틀었다. 저렇게 살 수도 있다. 나는 한 달동안 집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이 여기다. 누가 떠민 것이 아닌 내 선택이었다는 점을 우울해 한다. 이것은 자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7할을 밀려 그곳에 도착했고, 내가 고를 수 있는 3을 다해 여기를 점찍었다. 어깨까지 파마머리의 여자는 연신 부동산의 여자에게 고맙다며 허리를 숙였다. 고마워야 할 사람은 그곳에 들어가는 나였는데 말이다. 나는 아무에게도 고맙지 않았다. 안녕히 계시라는 말만 했다. 계약서를 깊이 찔러넣고 나오는데, 잘 구워진 식빵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아마 그 부동산에 남은 여자 둘이 먹겠지. 남에게 주려고도 꺼낸 식빵이라면. 곰팡이가 겨우 점처럼 생겼을 뿐이었니까. 다 타버려서 갈색이 되버렸다니까. 그게 곰팡이인지, 식빵인지 알 수도 없게 말이다. 갈색의 약 포장재와 반투명한 색깔의 연고가 떠올랐다. 동네 약국에서 팔았다. 조금 더 커서 알아보니 처방전 없이는 살 수 없는 약이었다. 


_

두 번의 계약이 파기 됐다. 한 번은 집주인이 파했고 한 번은 내가 파했다. 그 얘긴 너무 길어 이담에 따로 하겠다. 같이 살 던 친구들은 모두 집을 구해 나갔고, 제일 늦게 이 집에 왔던 내가 제일 마지막까지 남게 되었다. 내 집도 아닌 곳에 머물면서 나갈 집을 못구했다. 나는 그날 지하철에서 내려 10분을 걸어갔고 10분 집을 보고 10분 동안 계약서를 썼다. 삼십분 만에 계약한 곳이 바로 지금 사는 곳이었다. 이 집이 아니면 이사를 못갈 거라고 했다. 내가 원했던 가격보다 이천만원이 비쌌고, 그나마도 계약서까지 작성하던 남매가 다른 곳을 좀 더 보겠다며 나간 곳이라고 했다. 이런 운이 없다는거다. 그 모든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계약을 하지 못하게 되면 대체 어떤 집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말은 옳다고 생각했다. 


잔금 치루는 당일, 부동산에 사람들이 모였다. 이사를 나가는 사람과 들어올 사람 그리고 집주인. 잔금을 치루려는데 이사 나가는 사람이 억한 심정으로 말했다. 관리비를 3만 7천원이나 받았으면서 하나도 관리는 안하고. 나는 삼만 칠천원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태연하게 천몇의 돈을 넣을때도 놀라지 않았는데 말이다. 관리비가 있다고요? 통상적인 관리비 1,2만원을 말했던 부동산 남자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건 그 집 세입자끼리 정하는 겁니다. 집주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나는 왜 진작에 말해주지 않았느냐며 소리를 높였지만, 진작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 잘못인 것 같았다. 돈을 받아 나갈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주인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고. 나는 집주인도 아닌 그 남자에게 잔금을 지불했다. 원칙적으로는 아닌 것 같았지만, 당장에 받아 나가야 하는데 집주인은 이체 한도가 안된단다. 나는 그 한도를 만들려고 은행을 두 번 다녀왔다. 돈을 도둑맞는 심정이었지만, 내가 스스로 넣었다. 한숨이 가까웠고, 저 집 앞에는 내일 아버지가 도착하실 것이고, 나의 동생들이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3개월 뒤, 집 앞의 단독 2층 주택이 하루만에 부서졌다. 


창문이 사방으로 깨지는 소리가 얼마나 사람을 힘겹게 만드는지 알게 되었다. 못부는 리코더 소리도 이제 끝이구나. 방안에 틀어박혀 폐허가 되고 있는 앞을 보며, 나는 그날 더 생각해 보겠다며 자리를 뜬 남매의 얼굴을 그려보고 있었다. 그런 운이 없다. 복받은 남매여, 내가 그자리에 왔으니 그대들은 어디서 잘 쉬고 있나. 이곳은 먼지가 집을 통과해 사방 5M로 날아간다. 공사판 팀장과도 싸우고, 인부 아저씨하고도 싸우고, 민원을 넣고, 팔짱을 끼고 공사판 앞에 짝다리로 몇 십분을 서있다가 씩씩거리기를 수차례. 그해 여름 우리는 카페를 전전하며 집을 피해 돌아다녔다. 가을이 되자 5층짜리 빌라가 들어섰다. 지금은 그 빌라 302호의 불빛이 자주 내 방에 넘어오며, 빛이 조금도 들지 않는 2층집에 살고 있다. 


이 덕분에 2년 후, 나는 그 집 주변이 공사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법적으로 저 주택만 부술수는 없어요. 저 앞의 빌라와 함께 부셔야 새로운 빌라 준공이 가능한거죠. 하지만 저 앞의 빌라는 규모가 꽤 됩니다. 두 개를 한번에 부시기 쉽지 않겠죠? 주택을 누가 두 개를 매입하고, 그래야 하니까. 결과적으로 새로운 뭔가가 들어설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혹은, 이 주변은 재개발 지역이야. 공사 못한다고. 재개발 지역? 그건 재개발이 안되는 지역이란 뜻이지. 이런 대답들을 구하며 말이다. 나는 그 집을 기도한다. 8살 아이와 4살의 아기가 편하게 잠을 자는 곳이라면 우리 또한 살기가 나쁘지 않겠지. 잘 할 수 있겠지. 이 말을 두 번으로 모자라 세 번을 완성하고 잠자리에 든다. 페인트를 사야지, 분홍색 창틀, 군데 군데 나간 흰색 문에 사포질을 하는 상상. 커튼을 사야지... 의자를 놓고, 그 앞에 책상을 두고, 스탠드를 키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무언가를 쓰는 생각을 눌러 찍는다. 그게 확실하다는 듯이, 변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후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스트휴먼의 무대  (0) 2017.01.25
산북면  (0) 2017.01.18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은  (0) 2017.01.16
에버랜드의 잠  (0) 2016.11.14
내가 알 수 없는 노래  (1) 2016.10.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