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방 문은 미닫이로 호리호리한 검은색 철제다. 시간이 지나 어쩐지 둔탁해지는 나무 문과는 다르게 언제나 단단한 외양이다. 어쩌면 시간에 지쳐도 내색을 잘 감추는 어머니 같다. 이 문은 예외 없이 늘 열려 있는데, 미닫이창의 속성상 반을 닫고 반을 열어놓는 탓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시야 일직선으로 이 미닫이문이 닿는다. 반쯤 닫혀 주방의 안쪽을 쉽게 볼 수 없는 대신, 주방으로 공간 열려있음을 알려주어 집 안의 답답함이 없도록 하는 장치였다. 이 문틈에 먼지가 없는 것이 어머니의 생활이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깨끗한 문틈이 좋았고, 여쭙지 않아도 어머니의 여전함을 확인할 수 있는, 은근한 기쁨이었다. 주방에 싱크대는 ㄱ자인데 쓰임은 ㅡ자에 가깝다. 길게 뻗은 싱크대는 얼마 전 바꾸어 하얀 대리석 장..
세상에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무수하게 샘솟을 오해를 막기 위하여 선을 긋겠다. '어쩔 수 없었다'는 인간이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만 붙여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인간-비인간의 맥락에서 뿐이다. 간략한 설명이 온전하길 바라며 다음으로 넘어가자. 세상에는 그런 것이 생각보다 만연한데, 속세의 모서리만을 찧으며 살아온 이들은 그런말을 잘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끝내는 자신이 경험한 후에야 겸허히 어쩔 수 없음에 대해 한 페이지 길게 쓰게 된다. 그게 나라니. 나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때, 2만명의 운집 속에 약 49%정도는 '어쩔 수 없이' 소리를 질렀다. 51% 사람들은 그 보다 한 박자 늦어서 소리를 질렀고, 그..
한 때 텐프로, 빛, 살인범 애인, 형사, 범인을 잡기 위해 조직의 일원으로 잠입하는 형사. 사랑, 일까. 싶은 영화는 많았다. 이 사이에 '무뢰한'이 있다. 똑같죠 뭐. 라는 듯한 포스터로 뻔뻔하다. 영화는 이전과 '다르다'고 크게 말하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은 이런 클리셰를 박차고 나올것으로 기대되는 두 배우같다. 영화는 여름인데 스산한 가을을 연출한다. 계절을 어긋나는 스냅에서 동류의 영화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예상해 본다. 말하자면 사랑에 대한 '다른 태도' 같은 것. 영화 내내 정재곤(김남길)은 정장을 입고 지친 기색이 없다. 이런 삶 '따위'에 끈적거리면서 붙들려 (열심히)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 김혜경(전도연)은 특별히 순수해서 ..
1. 만두를 빚기 전이고 마늘을 한 접 깐 후다. 2. 단독 주택인 고향집은 웃풍이 심하지만 그 못지 않게 햇빛이 많이 들어온다. 우선 거실에 아주 큰 창이 있어 하루종일 해가 머문다. 여기가 남향이다. 동향인 안방에는 아침이 대단하게 온다. 이렇게까지 빛이 들어올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신 것. 안방 건너편으로 방이 두 개 있다. 각각 남향과 서향이지만은 둘다 서향에 가까운 빛이고 그 방은 차분하다. 부엌과 욕실이 북향으로 배치를 이뤄 단촐하지만 집에는 해가 사방을 돌아나간다. 이런 집에서 스무해를 보냈다. 이러니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향에서 잘 때면 보통 한 방향만을 선택할 수 있는 '방'에 들어사는 도시에서의 살림이 새삼스럽게 마땋찮다. 벽을 끼고 있어야 할 방향에 창을 내 덥고 추운데서 지내는..
2016 꼭 이루고 싶은 한 가지-무가 아닌 모든 것 고백처럼 무를 생각한다. 나를 스쳐간 이만 오천여개의 무를 생각하는 밤, 지금까지 어떻게 무 없이 한 해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거의 모든 사람이 무를 말하지 않고 내년을 생각한다. 믿을 수 없는 얘기다. 내게는 이 ‘무’를 생각하지 않는 일이 정말 ‘無’같이 느껴진다. '무'란 무엇인가. 조금 떨어져서 살피면 속된 자연에 굳세게 자라 '이것이 흰색이다'라고 알려주는 맑은 얼굴이다. 잘 뻗은 몸뚱아리에서 상쾌하게 이어진 머리까지, 어디 하나 버릴 데 없이 조림이며 국물을 내는 밑재료로 아낌없던 채소다. 김장철이면 시뻘건 고춧가루에 묵혀 깍두기라는 이름으로 산산이 분열하기 마다하지 않았던 무.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 싶은 무는 이제껏..
회의를 하는 도중에 전화가 울렸다. '아부지' 이름이 선명해서 잠시 받고 오겠다고 했다. 밖에 나가 전화를 받으니 내가 다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걷는 소리, 무언갈 내려놓는 소리,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 호흡하는 소리, 다시 걸음 소리...같은게 들렸다. 잘못걸린 것 같았고 나도 알았다. 예전이라면 십초 정도 목소리를 기다렸다가 끊었을텐데 어쩐지 일분이 넘게 그 소리를 듣는다. 바깥을 좀 걷다가 왔다. 걷는 소리를 따라 걸어보았다. +목이 심해서 운동을 하기로 했다. 피가 많이 돌면 아픈데도 나을거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오른쪽 볼에 점이 있구나. 그 생각을 오래했다. 지금부터 나는 그 점이 없어지기라도 할까봐 불안해질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나오면 약속처럼 1번 출구. 거기서 만나기..
낮은 하늘에 마른 구름이 몇 점. 그 아래 생각났다는 듯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거리다. 바닥을 이는 낙엽이 스산한 리듬을 이루는 저녁, 한 사람이 이 우울함에 맞춰 어디론가 뛰고 있다. 그는 충전잭을 찾아 벌써 네 개의 대리점을 찾았다. 그의 주머니 속엔 뜀에 맞춰 불안하게 흔들리는 꺼져가는 핸드폰이 있었다. 그의 핸드폰은 당시 고객수를 늘리기 위해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판매하던 그야말로 ‘보급형’ 제품이었다. 화면은 말할 수 없이 작았고 오밀조밀한 자판을 갖춰 대체로 작다는 게 자랑인 제품이었다. 사용한지 1년쯤 되었을까. 스마트폰이 대두되기 시작하더니 모든 것을 바꾸려는 듯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그가 밤거리를 뛰어다녔던 것은 이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바뀌는 시대를 대하는 한 사람의 무력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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