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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방 문은 미닫이로 호리호리한 검은색 철제다. 시간이 지나 어쩐지 둔탁해지는 나무 문과는 다르게 언제나 단단한 외양이다. 어쩌면 시간에 지쳐도 내색을 잘 감추는 어머니 같다. 이 문은 예외 없이 늘 열려 있는데, 미닫이창의 속성상 반을 닫고 반을 열어놓는 탓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시야 일직선으로 이 미닫이문이 닿는다. 반쯤 닫혀 주방의 안쪽을 쉽게 볼 수 없는 대신, 주방으로 공간 열려있음을 알려주어 집 안의 답답함이 없도록 하는 장치였다. 이 문틈에 먼지가 없는 것이 어머니의 생활이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깨끗한 문틈이 좋았고, 여쭙지 않아도 어머니의 여전함을 확인할 수 있는, 은근한 기쁨이었다.
주방에 싱크대는 ㄱ자인데 쓰임은 ㅡ자에 가깝다. 길게 뻗은 싱크대는 얼마 전 바꾸어 하얀 대리석 장식이 빛난다. 그리고 서 계신 어머니의 뒷모습. 비로소 주방이 살아나는 모습이다. 싱크대 건너편 벽 쪽에는 이십몇 년이 훌쩍 넘은 장식장이 있다. 외관은 물론 나무로 된 것이지만 유리 간이 있어 실루엣이 어른어른하는 거였다. 어머니가 항상 비치던 창이다. 누구보다 어머니 뒷모습을 보고 있었을 장식장. 언젠가 그 창을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아픈 웃음이 돈다. 미닫이 문틈을 건너 주방으로 갈 때면, 나는 어머니의 공간으로 가는 것이다.
2.
올해 설날 어머니는 점점 더 작아지셔서 만두소를 만들고 계셨다. 당면을 찌고 부두를 으깨고 부추를 썰고 고기를... 그것은 너무나 큰 양푼으로 가득이었다. 언제까지 만두를 빚을 수 있을 만큼 많았고, 만두피는 따뜻한 바닥에서 노골노골해지고 있다. 매해 힘에 부쳐 만두를 그만 빚어야겠다고 하시면서도, 딸네들이 만두 빚냐며 기대로 내려오면, 그 재미있는 공작을 시켜주기 위해 나이 든 어머니는 소를 반나절 준비하시는 거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주방에서 제외되었는데, 대신 주방을 가능하게 하는 일에서는 언제나 포함이었다. 무를 뽑아오거나 호박을 따오라거나, 불을 때라는 어머니의 준엄함에서는 한 시도 늦장을 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다분히 가부장적인 곳에는 틀림없다. 주방일을 거의 하지 않는 아버지, 그것을 보고 자란 나는, 그러나 아버지를 언제든지 으름 잡는 딸년으로 컸으며 석이는 딸네와 비교할 수 없이 집안일을 솔선수범하는 아들로 자랐다.
3.
어머니는 우리를 한 곳에 둘 장소가 필요하다. 오전에는 전이었고, 오후에는 마늘이었고, 이제는 만두다. 준비된 양푼은 두 개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나를 위해 소고기로 만두소를 준비하는 두 배의 수고를 하신다. 이 초대에 기쁘게 응하는 것이 설날의 됨됨이라. 만두피가 적당히 말랑말랑해질 때 이음매를 단단히 할 따뜻한 물을 준비하고, 이 만두소를 다 쓸 때까지의 이야기 올리는 것으로 만두 빚기는 시작한다. 그것은 우선 만두 자체로 입을 뗀다. 같은 만두피와 만두소, 숟가락으로 빚지마는 모양이 제각각인 것이 웃음인 것이다. 둘째는 만두를 저만치 작게 만들고 있다. 나는 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속을 처넣고 있다. 어머니는 중도다. 연륜은 언제나 피가 적당히 받아들일 소를 넣을 줄 안다. 어머니는 둘째의 만두를 먹음직스럽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조금 더 욕심내서 속을 채우라고 넌 시지 건넨다. 맛있기는 내 것이 맛있겠다. 라고 하는 말에서 나는 더 기뻐져 더 이상 '구'일 수 없을 정도로 속을 넣는다. 꼼꼼히 만두를 여물 때, 손끝으로 누르는 한 땀 한 땀마다 이렇게 커버린 내, 눈이 머문다.
만두 소는 어머니가 준비하시고 만두 피는 슈퍼에서 사 왔는데,, 이 두 개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가늠한 데서도 올해는 만두피가 모자랐다. 만두는 오늘 다 빚어야 하고, 만두피가 모자라니 피를 더 사 오는 수밖에.. 아버지 차례인 것이다. 음식을 다 못 만들게 생겼으니 주방이 아니다. 만두피 좀 사 오는 것이 어떻소? 라고 어머니가 미닫이 건너편에서 거실로 이야기를 하니, 둘째가 만드는 것과 첫째가 만드는 게 어쩜 이렇게 다른가 하며 감상에 젖었던 아버지는 갑자기 버럭 하신다..
그 요는, 어떻게 창피하게 만두피를 사러 가느냐는 것이다. 모녀는 그것이 너무나 우스워 되묻는다.
4.
-아버지, 만두피를 사는 게 어찌 창피하소. 아버지는 대답하신다.
-아니 만두피만, 만두피 그 많아야 두 봉지 살 것 아니냐. 두 봉지를 덜렁덜렁하고 오는 게 얼마나 창피하냔 말이여. 처음에 살 때 딱 맞게 사놓았으며 좋았을 걸 이 어떻게 창피하게 그런단 말이냐. 나는 만두만큼 크게 웃는다. -아버지, 그러면 안 창피하게 잘 사 와 보소.. 몰래 사오시든지.
웃음이 도돌이표처럼 어머니에서 둘째로, 둘째에서 나에게로 이어진다. 세상에 만두피를 사는 게 창피하다니, 하면서. 그러면서 어머니는 말미에 못을 박는다. 만두를 못 만들게 생겼으니 좀 다녀오시구려.. 아버지는 만두를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가신다. 이윽고 차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 물으신다. 내 생각에 아버지가 만두피를 사러간 것 같은데, 니들 생각은 어떠냐. 우리는 모두 그렇다고 했다. 저리 말씀하셔도 만두피를 최대한 덜 창피하게 사 오는 거 아닐까요?
5.
한참을 웃으며 만두 한 냄비가 다 쪄질 무렵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아버지보다 화가 먼저 현관을 들어선다. 주변 큰 슈퍼를 세 군데나 갔는데 이놈의 만두피가 다들 없다. 하시면서. 만두피가 없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고, 요새 만두 빚는 집이 없긴 없구나. 딴청을 피운다.. 아버지는 심지어 한 가게에서는 냉동창고까지 갔다 왔는데도 없다고 하신다. 되었으니, 아버지, 설 지나고 만두피를 다시 사 오는 것으로 이날 만두 빚기를 마무리했다. 피가 하늘하늘 잘 읽어 안쪽이 보이는 만두로 이 날 저녁을 차렸다. 만들 때와 달리 속이 적게 들어가 볼품없어 보였던 둘째의 만두는 피가 적당히 쪼그라들면 수축해 맛있는 만두가 되었다. 더 어쩔 수 없이 속을 채워 넣던 내 만두는 숨을 토한 것처럼 잔뜩 퍼져서 먹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만두로서의 욕심은 이뤘지만, 먹는 이를 헤아리지 않는 결과였다. 그러나 만두는 돼지 만두가 맛있고, 이 집에서 소고기 만두는 나만 먹는데, 나는 소고기 만두만 빚었으므로 그 탐나는 퉁퉁 함은 모두 내 것이 되었다. 퍼진 만두를 몇 입에 걸쳐 먹으면서, 그래도 맛있다, 는 이야기를 빼놓지는 않는다.
6.
만두피 사러 가는 걸 창피하는 아버지를 소재로 한바닥을 쓰는 나는 그 만두를 닮았다. 말하자면 내가 가득 처넣어 만든 만두처럼 재미있는 쓰기였지만, 읽는 이에겐 어떨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나중의 나는 읽으면서 그래도 우겨먹었던 만두처럼 슬프게 '맛있다' 할 것이지만. 명절이 지나고 어머니의 일상을 생각하니 자연 주방의 미닫이문이 떠오른다. 깨끗한 문틈. 안전한 어머니의 장소. 언제든지 넘어오라는 문턱 낮은 환대의 장소. 우리에게 대충하는 한 끼가 없었듯이 스스로에게 차리는 한 상 역시 정성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적으려는데 화가 난다. 대체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인가. 내가 그 만두 '맛있다'한 의 말미와 이렇게 닮은 슬픈 꼴이니. 만두 끝을 꼬매던 것처럼 그저 여며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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