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부터 비였다. 많이 내리진 않았지만 바람이 불어 제멋대로 날렸다. 가냘픈 우산을 피느니 맞기로 한다. 몸이 어지간히 데워졌기 때문이다. 뻑적지근하게 무슨 일이라도 끝낸 사람처럼 거만해져서 이런 비쯤이야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 모자를 쓴다, 담배를 핀다, 수선거리다가 수분 내 흩어졌다. 그밤, 있던 자리는 빗방울이 제멋대로 치고 있을 것이다... 게를 먹고 헤어지는 길이었다. 게껍질을 쌓아놓는 대접을 몇 차례 바꿨다. 역사 계단을 내려오며 엊그제 게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좋아하지요. 라고 대답했던 일을 생각했다. 같은 물음을 받았던 회사 사람들은 대체로 미적지근한 반응이 돌아왔음에 다분히 좋아하지요라는 분명한 호감을 보였던 것이다. 기억하기로 찐 게는 먹는데 위화감이 없다. 살이 희고 깨끗하..
월드컵 경기장 근처 공원에는 근처 조경을 위해 만들어 놓은 정자가 있다. 정자 주변에는 깊이 30cm정도 될까 얇팍한 물을 고여 놓았다. 크기는 팔을 세 아름쯤 벌리면 폭 안길만한 직경에 웅덩이가 그런대로 어울리겠으나 ○○연못이라 해놨다. 그 안에는 라는 표지가 세 개나 꽂혀 있다. 서른 살 먹는 이 케익 위에 비좁게 꽂히는 초마냥 말이다. 기껏해야 종아리도 다 못젖을 것 같은 연못에 들어갈 경우 무엇이 위험할지 선뜻 알 수 없었다. 누가 위험해지는가. 1. 정자관리소장 2. 어색하게 심겨 있는 부들 3. 바지(마르지 않고 계속 젖는다) 그 중에 키낮은 표지판 하나는 라는 말이 써 있는데, 허리를 숙이고 보니 머리가 검은 물고기 너댓마리가 추위 내린 가을을 움직이고 있었다. 흘러내린 목도리를 등 뒤로 넘..
1.그는 자신을 김윌리라고 소개했다. 김윌리와 나는 책상 위에 걸터 앉아 시시한 이야기를 했다. 윌리가 와서 반가웠다. 무엇을 하자고 했는데 지금은 김윌리라는 이름만 겨우 기억난다. 오늘도 또 만났으면 좋겠다. 윌리가 누구냐고. 모른다. 나도 어제 꿈에서 처음 본 사람이다. 추측하건데 그는 귤의 환생이 아닌가 싶다. 어젯밤 산지직송 코너에 재미를 붙여 무엇을 어떻게 팔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있었다. 진짜로 살 수도 있다는 마음이 약간은 있었기에 몇 가지를 물망에 몰리기도 하며 꽤나 신이났던 것이다. 54가지 산지직송 메뉴를 살펴 본바 마침내 4강에 오른것은 사과와, 귤, 미니 파프리카, 사과대추였다. 사과대추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대추가 이렇게 커가지고 여러입을 베어먹을 수도 있었다. 주변에서 대추향이..
어제 전시를 봤다. 해를 등지고 있는 집에서 무료하게 있다가 세 시쯤 가볼까 싶었다. 이내 내일로, 다음주로 미루고 싶었지만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다음달 15일이면 끝나는 전시였다. 한 시간이면 도착할 것이었다. 멀리 인도에서 온 얼굴에는 양감 가득한 그림자가 있었으며 책에서만 보던 귀한 불상은 시대 순으로 서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다음과 다음이 연상되었다. 그 끝에는 미술사 책을 넘기던 예전의 내가 있었다. 반가사유상은 두 점 나란히 였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천장에 자리한 조명 아래였다. 그것은 해처럼 떠올랐다가 지길 반복했다. 빛에 따라 지는 그늘에 얼굴을 수 차례 보다가 왔다. 그곳에서 며칠을 산 것 같았고, 그것은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일지도 몰랐다. 나오니 밤이 저릿저릿..
그때 내게 등을 보여준 유리간 한칸만큼 공중을 두는 긴장이 사진에 놓였다. 구부정한 어깨, 그저 앞을 볼 것 같은 시선. 잠시 말 없을 것 같다. 혹여 남자가 좀 더 의젓하게 앉았거나, 여자의 하나로 묶은 머리가 안쪽 어깨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이들 사이에 놓인 물건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마음 들었을까. 이들은 더위에 쉬고 낯섬에 쉰다. 잠깐은 말이 없어도 좋겠지. 상대의 곤궁을 완전히 다 알 수도 없고, 얼굴에 그대로 그려낼 수도 없다. 지곡열 가는 길이었다. 옛 집을 보러온 이들이 소란했다. 안쪽에는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아이들에 부모가 씨름을 하고, 쉼없이 밀려드는 이들을 안내하는 어르신의 쇳소리가 문지방을 오갔다. 온천을 하러 왔을리는 만무하다. 중간 턱에 있는 도서관에 왔더라면 그렇겠다...
온천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기 전에 수영복을 챙길까, 고민하다가 예전이 생각났습니다. 비가 오는 바람에 수영장에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여행 내내 짐이 되었던 일입니다. 그 노천탕은 매우 싼 가격이었는데(한화 이천원 정도)수영복을 입지 않으면 출입이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때마침 그날 아침부터 마침 비가 왔고, 비를 맞으며 온천 할 생각은 없었기에 연기가 펄펄나는 온천수만으로도 즐거우리라 생각했습니다. 라고 말은 해도, 온천을 가면서 반쯤 포기하고 채비한 것이지요. 태도가 이러했습니다. 옷을 다 벗고 한 시간쯤 있기에는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어쩌면 다녀왔다, 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만족할 것이었죠. 온천을 구경하러가던 길목에, 큼지막한 정자가 있었습니다. 현지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습니다. ..
어제 욥기를 두 번째 읽었고 오늘 왕좌의 게임 5기 10화를 봤다. 저번 주말, 안경을 바꿨다. 가끔, 다시 땅을 파고 싶다. 어제 손톱을 깎는 시간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똑똑 하고 떨어져 나가며 단정하게 만드는, 아프지도 않는. 잘린 손톱과 아직 손톱인 것을 함께 내려다보는. 저저번주에 집에 내려가 마늘을 세 시간 동안 깠다. 왼손 검지 끝 감각이 아직도 덜하다. 굳은 살이기를 빌고 있다. 마라톤 일정을 알아보고 있고 여름이면 더워지는 수족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왕좌의 게임에서 가장 마음 쓰이는 캐릭터는 테온이었다. 5기가 진행하도록 그에게는 적절한 순간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는 늘 엇나갔다. 실패했고, 돌이킬 수 없어보였다. 여전히 그렇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다는 것은 그가 아직 살아..
점심을 넘겨버린 세시, 미팅이 끝나고 근처 식당을 물었다. "아직 점심을 못드셨구나, 직원식당에서 제 이름 대고 드셔요." 황량한 곳에 혹시 모를 가게를 물었다가 기대없는 친절에 화색이 돌았다. 나와서 실제로 그 식당에서 밥을 먹는 어느 직원에게 그 위치를 물으니. "거기 끝났어요." 모니터로 돌리는 고개가 불퉁했다. 세시면 식당도 끝나고 정리에 들어갔을 시간...이겠구나. 역시 뭘 잘 모르는 부장과 그런 걸 왜 묻느냐는 경리의 입은 이렇게 달라서, 원하지도 않았던 기대를 잠깐 가졌다는 이유로 배는 더 심하게 찌그러졌다. 점심을 먹지 못하는 사정은 각자 언제라도 있었을 것. 아쉬움이 눈에 보였는지 내려가면 식당이 있다고 한다. "거기 중국집도 있고 한식도 있고 여러가지 있어요." 여러가지가 있을 곳은 아..
지하철을 기다리며 신문과 몇 종류의 빵, 껌 등을 파는 매점에서 왠일로 호박맛젤리를 샀다. 이곳의 물건은 다른 곳에서처럼 같은 이름의 물건이겠지만 유난히 그곳에서는 궁색해보이는 특징이 있었다. 궁색을 부러 좋아하지 않는 요즘 사람의 특성상 지하철의 번잡함과는 달리 그곳은 물건을 파는 곳인지 의심이 들정도로 사람이 없는 것 또한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복권이 있었던가? 복권이 있다면 단박에 궁색은 공감같은 것으로 둔갑한다. 궁색을 피하다가도 일주일치의 희망을 묻는 곳이 될 수 있으니, 우리의 얼굴은 양면이 아니니 잘 살펴 지나갈 일이다. 매점의 물건 중에 호박맛젤리라는 상표도 연원도 모르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곳의 궁색과 잘 어울렸다. 개당으로도 판매하는 것 같았는데, 백 원이라는 참으로 오랫만에 들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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