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계절을 탄다. 봄이라 꽃을 파시는 분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렇게 바람이 불어도 삼월은 삼월이라는 듯. 작은 리어카에 아직 봉오리 눈감고 있는 프리지아가 한 단씩 묶여 있다. 그걸 열심히 사가는 사람들이 있다. 꽃을 사는 사람들. 많이는 아니고 딱 한 단씩만 사갔다. 구경한 값인 듯 했고, 오랫만에 장이니까 그런 듯 했고, 여유 있어서 사는 꽃이 아니라 봄인데, 바리바리 시커먼 비닐봉투, 그 사이 꽃 한단씩 못 꽂겠나 하는 마음들인 듯 했다. 내가 사지는 못해도 사는 것을 보고 즐거웠다. 저 꽃들이 모르는 집집마다 노랗게 눈이 뜰테고. 삼월은 너끈히 그 향기 진해지는 것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니 활짝 핀 히아신스가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니 다 핀 히아신스를 파는 것이 ..
잠시 후 지하철 문이 열렸다. 작은 발이 허공을 찼다. 다음에는 바퀴가 굴렀다. 유모차가 두 대 였다. 마지막으로 부부가 탔다. 서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지하철칸이었다. 아이들의 아빠는 두개가 좌우로 붙은 유모차를 잡고 있었고, 문을 등지고 들어온 그대로 서 있었다. 움직일 만한 곳이 없었으므로 문은 막고 있되 통로는 마련하며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커다란 눈으로 지하철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아니었다. 두 살 쯤 되었을까. 각각 빨강 주황색 패딩을 입고 있었고 작은 얼굴이 모자에 폭 싸여 있었다. 바지 위에 프릴이 달린 치마를 덧 입고 있었다. 아이가 뛴다면 발이 지면에 닿을 때 치마는 위로 폴폴 날으리라. 좁은 유모차에서 두 눈만은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부부는 인테리어 비용..
내 자리에서는 내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장서수가 손꼽히는 이곳 도서관의 풍경은 학생과 책, 대체로 그 둘의 놀랍도록 다양한 조합이다. 책을 다섯 권 이상 쌓아 놓고 읽는 사람, 한 권을 두 손으로 펼쳐서 집중해 보는 사람, 흐트러진 책 사이로 어제의 잠을 마저 자는 사람, 머리칼과 머리칼, 책이라는 로맨틱한 물체를 통해 사랑을 대화하는 연인들. 그곳에 아이러니한 풍경 하나 추가다. 한쪽에 마련된 복사실에서 복사와 제본이 쉴새 없이 일어난다는 것. 저작권에 위배가 되기 때문에 책 복사를 금한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자료가 필요한 이들에게 어떤 복사는 피할 수 없는 일일 것.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제본 문의가 들어오고 날짜를 조정한다. 그래서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복사기는 조금도 쉬지 않는다...
숨을 조심스럽게 쉰다
열이 솟으면 피부로 달라 붙기 때문에 몸에는 기운이 없다. 너덜너덜해진 팔다리를 바로 눕히면서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동네에 벽돌로 허름하게 지은 집이 하나 있었다. 얼마나 허름했던지,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린 모양이 그대로 다 보이는 집이었다. 어느 틈에 손을 잠시 쉬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떤 남자가 시멘트를 개고 벽돌을 하나씩 올렸다. 동네사람들이 도와주기도 했을 것이나, 대부분은 혼자서 지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어진 작은 집은 밤이 되면 노란 불이 들어왔다. 집 뒤에는 대숲이 있어 작은 집을 안아주었다. 밤이면 파랗게 흔들리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냈다. 작은 방에는 좀 모자란 여자와, 너무 가난한 남자가 함께 살았다. 좀 모자란 여자는 너무 가난한 남자를 사랑해서 항상 붙어 다녔다. 너무 가난..
꼭 오백년이 되었다. 이 곳에서 멈춰 볕을 쬐던 사람은 모두 투명해졌다. 투명해져서 눈 크기만한 창살을 지나갈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 오분 정도 서 있었다. 살 안쪽으로 단청이 무지개빛 내는 것을 보았다. 이 창살 앞에는 기둥과 초석이 기둥과 초석을 마주보고 있었다. 열린 아득한 시간. 저 끝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곳을 걸으려다가 원숭이 조각에 손을 얹어 사진을 찍고자 했다. 가슴의 양감이 잘 살아 골짜기가 깊은 왼쪽의 것과 함께였다. 그곳에 당신을 세우고 오래된 기둥과 함께 찍었다. 내가 할머니가 되어도 당신을 오빠라고 부를래. 부드러운 볼을 만지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원숭이가 모르는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투명해 질 것인지, 단단해 질 것인지, 그것을 묻는 듯 했다. 단청이 무..
아침을 늦게 나왔다. 버스가 내렸다. 음산한 하늘이 계속 이어졌다. 머리가 날개죽지까지 기른 여자가 돌을 들고 지나갔다. 손바닥 크기의 돌은 황갈색의 바탕에 흑갈색의 점이 무수히 박혔다. 귀퉁이가 부서졌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돌을 가볍게 집었다. 소녀는 돌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점점 부서지는 돌, 작아지는 돌, 소녀의 아침이었다. 돌을 닮은 빵이었다. 연산자로 가득한 에이포용지가 내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버리려고 했다. 옆에 있던 남자가 그것을 가져갔다. 그의 것이었다. 한 바퀴 돌고 다시 자리로 오니 옆자리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잠시 후, 태교에 관한 책 세권이 옆에 놓였다. 커다란 배가 나타났다. 남자와 함께였다. 연차라도 낸 모양이지, 남자는 토익책을 꺼내고 노트북을 꺼내 강의를 듣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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