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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매섭고, 파랬다. 토요일날 을지로에 갔다. 을지로는 꼭 가보고 싶었다. 조명가게도 있고, 가구 거리도 있고. 이 날은 도배지를 고르고 도배를 예약하기 위해서였다. 도배야 동네에서도 할 수 있지만, 을지로란 어쩐지 도배의 고수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그 주에는 가야지 생각은 여러 날 했지만 가기 전날과 가는 동안에 좀 긴장이 되었다. 도배를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몰라서였다. 어떻게 여쭤보지? 무엇을 요청해야 하지? 대략적인 견적은 알고 갔지만, 도배지를 잘 고르게 될지, 이 집에서 해야지! 라는 확신을 어떻게 갖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는 것이라곤 몇 군데 가게 이름이었었다.
도착했을 때 너무나 많은 도배집들이 다 비슷한데 다른 이름으로 있어서 놀랬다! 얼마간을 걸어도 길 양쪽에서 도배집의 이름이 끝나지 않았다.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모두들 어떻게 알고 여기 오는걸까. 무슨 이유로 도배를 그 집에서 선택하는 걸까.
첫 번째 들어간 가게에서 신한, 개나리, 엘지 벽지를 차례로 보았다. 차이를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이 샘플집에서는 무엇을 골라도 한 롤에 3만원(실크벽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은 4명, 도배를 하는 데는 하루면 된다고 했다. 성의가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요새의 인테리어 추세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고. 몰딩이 점점 없어지거나, 걸레받이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거나. 그런 것들. 그러다가 바닥은 안 하세요? 라고해서 보고 싶던 마루의 샘플을 보게 되었다. 마루의 평당 시공가도 알게 되었다. 미리 받아본 견적보다 평당 만원은 비쌌지만 좋은 정보였다. 원래 보던 마루회사의 것과, 이번에 처음 본 마루의 차이를 잘 설명해 주셨다. 디엔매종의 경우 질감이 느껴지고 폭이 넓어 인기가 많다고. 이중에서 가장 인기 많은 종류의 바닥재 이것인데, 왜 수급이 어려운지도 알게 되었다(회사가 작아서) 구정 강마루는 왜 수급에 전혀 문제가 없는지도(말하자면 마루계의 대기업이라서 수급이 모자라는 일은 없다고) 다시 돌아와 도배지는 페인트 느낌의, 거칠거칠한 흰색을 만나고 싶었는데 부드러운 것 뿐이었다. 흰색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했다. 도배지는 총 2개를 고를 수 있다고 했다.
두 번째 가게에 들어갔다. 아까 가게보다 나이가 있으신 사장님이 적당히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옆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도배지를 고르고 계셨다. 전에 들렸던 가게 보다는 조금 더 정보를 주셨다. 도배지가 12롤에서 어쩌면 14롤까지 필요한데, 13으로 계산하면, 아까와 같이 한 롤은 3만원이고... 해서 좀더 정확하게 인부의 금액을 알 수 있었다. 역시 4명이 필요했다. 견적은 같았다. 다만 쓰레기 봉투를 준비해 달라고 하셨다. 아까는 없던 정보인데... 나중에 알아보니 기존의 도배지를 버리리기 위한 쓰레기 봉투는 준비해야 하는 것 같았다. 도배지를 고르시던 할아버지는 이거 저거 저거를 잘라달라고 하셨다. 샘플 북에서 작은 정사각형으로 잘라주셨다. 나도 그렇게 달라고 하니, 저분은 계약을 하셨다고. 늘 오시는 단골 손님이라고도 하셨다. 여기서 보니 개나리 벽지가 좋아보였다. 신한이 좋나요 엘지가 좋나요? 라는 질문도 했는데 벽지의 질은 별 차이가 없다고 하셨다. 비슷한 대답이로군. 손님이 느끼는 질감이나 디자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페인트 느낌의 벽지는 예민해서 작업이 까다롭다고 하셨다. 명함을 받아보니 TV에도 출연하신 분이었다.
세 번째 가게에 들어갔다. 다른 손님이 도배와 마루를 상의하고 있었다. 한 팀이 있었기 때문에 벽면의 벽지를 보며 기다렸지만, 인사도 아는채도 하지 않아 가게를 나왔다.
네 번재 가게는, 점심을 먹고 집에 갈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찾은 가게였다. 아까 첫 번째와 두 번째 도배집 근처에 있었고 다른 도배집처럼 작았기 때문에 지나치기 쉬웠다. 작고 조용한 가게에 한 분 계셨다. 이미 여러 회사의 도배지를 보았기 때문에 이제껏 보지 못했던 회사의 것을 말했다. (제일벽지) 두어군데 살피고 왔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성실하고 차분하게 저희는 도배에 이틀이 필요하다고,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 사람이 모두 손으로 하기 때문에 하루씩 나눠서 초배지 작업을 하고, 그 다음에 도배지 작업을 해야 고객 만족도가 높은 도배가 나온다고. 그리고 이 작업 사이에는, 새집이 아니고서야 벽이 아주 고르지 않기 때문에 핸디코트 작업이 추가로 필요할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다(물론 하지 않을수도 있다)
작업한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웬걸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벽과 생김이 같았다. 벽마다 도배지가 울퉁불퉁하게 솟은 면이 있는데, 이게 그 밑작업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다. 고양이가 있어서 페인트처럼 질감이 거칠고 스크레치가 무늬처럼 있는 벽지를 본다고 했더니 정말로 두껍고 강해보이는 것을 골라주셨다(현대벽지, 엘지벽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벽지는 손으로 만지면 쏠려서 아프다고 했더니, 도배를 언제 했냐고 물으시고는, 5년 되었다고 하니 그럼 유성잉크를 쓴 도배지일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실크 벽지가 지금은 친환경으로 수성잉크를 써서 나오지만, 그 전에는 유성잉크를 썼다고 하셨다. 아, 우리집 벽지가 친환경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바닥은 혹시 하시냐고 해서, 마루를 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인테리어 카페에서 마루만 전문으로 하시는 분들께 하라고 추천해 주셨다. 요새 걸레받이의 스타일이 작은 것이 유행인데, 그래도 6cm정도가 적당하다고 추천해 주셨다. 마루의 색과, 도배지의 색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마루색도 아직 고민중이라고 했다. 길고 긴 이야기 끝에 도배지는 아까보다 좀더 비싼 종류를 보게 되었고, 3.5만원, 그래서 총 견적도 조금 비싸게 나왔지만, 이 정도의 이야기와 이틀에 걸친 작업에 비하면 전혀 비싸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도배가 마르는 시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이사를 언제쯤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도. 쓰레기봉투에 대해서 여쭤보니, 종합 인테리어를 하지 않는 한 그건 준비를 해야하고, 관리사무소에 물어서 따로 폐기물을 버리는 방법을 알아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하셨다. 명함을 받아들고 나왔다. 그 사이 다른 손님이 오셨는데, 상담을 하는 우리를 배려하면서도 새로운 손님을 살갑게 챙기는 모습을 봤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긍지가 있고, 손님에게 이 일에 대한 이해를 주려는 모습에 감동하며 나왔다. 그렇다고 여기서 꼭 해달라, 라는 어떤 권유도 없었다. 도배 상담을 받으러 갔다가 인생 수업을 받고 나온 느낌이 들었다.
4군데 가게를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았다. 확실하게 도배지를 고르거나 계약한 건 아니지만 오늘 본 가게중 하나에서 하게 될 것이다. 태어나 처음 들어간 업장에 20분 남짓 사장님들을 만났다. 이런 태도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이렇게 작은 가게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니 이 추운 날씨가 별로 매섭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저녁때까지 잤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말하게 되는 건 배우면서도 힘든 일이야.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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