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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일 영화
<야구소녀>를 보았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주수인은 고등학교 야구선수이다. 이 말 자체도 그녀가 최초로 쓴 것으로, 그녀는 이제 프로가 되고자 한다. 그녀 앞에 무수히 괄호로 있었을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말들을 꺾고 무려 고등학교 야구단에 입단해서 선수생활을 했다(실력도 실력이었겠지만, 교장선생님께 빌었던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 다른 남자 선수들처럼 그녀의 꿈은 프로 입단이다. 주수인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들리지 않으나 노골적으로 명확하게 자신이 '여자'라는 점 때문에 프로 입단 테스트조차 어려운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래서 화가 나있다.
#네가 못하기 때문
이 무렵 박감독은 최진태를 부른다. 최진태는 프로를 꿈꿨지만 결국 실패했던 선수로, 선배 덕분에 고등학교 야구단 코치일을 맡게 된다. 이 허름한 인선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노장인 박 감독은 젊은 최진태를 불러 그의 엉망인 생활을 우선 안정케 한다('술은 끊었고?' 오자마자 3개월치 월급을 가져다준다. 어느 정도 박 감독의 돈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를 부른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최진태는 양육비를 줄 수 있게 된다). 최진태는 세상에 화가 잔뜩 나 있다. 프로에 가지 못했던 것은 눈이 없던 감독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놓친 사람이, 다시 그 일을 앞둔 후배들을 보게 된다. 대부분이 프로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는 박감 독보다 더 날카롭게 학생들을 보챈다. 그중에 주수인은 튄다(말도 안 듣고). '네가 여라라서 프로를 못 가는 게 아니야. 넌 힘이 약해. 그래서 안되는 거야.'라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해준다.
#같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명확하게 나눠서 짚어주는 어른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그냥 안된다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거기까지라고만 하니까. 여기에는 네가 여자라서 라는 말이 두루뭉술하게 섞여 있다. 그걸 나눠서 설명한 것이다. 주수인의 화는 다른 방법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면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150km의 공을. 주수인은 말 그대로 피나게 연습한다.
#조금 더 살아본 사람은 지혜가 있다. 그리고 감독이나 코치나, 그러니까 선생님들. 그걸 가르치라고, 그 지혜를 나누라고 주어진 자리에 가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사명이다. 이 자리에 처음 가게 된 진태는 주수인을 가르친다. 네 장점이 뭐야. 볼을 150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 하니 다른 장점을 키워야 한다. 빠른 공만이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박감독이 말했던 주수인의 특장점을 기억해둔 진태는 주수인에게 너클볼을 연습하게 한다.
#이 모든 건 주수인이 자신은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주수인이 먼저 포기 하지 않으니, 주위 사람은 그녀를 돕게 된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고 매일 연습하는 아이를 어떻게 그냥 버려둘 것인가? 진태는 프로에 가 있는 친구들에게 그녀가 뛰는 경기를 한 번만 봐달라고 경기를 만들고, 마침내 설득하고, 입단 테스트를 받게 도와준다.
#외로운 가운데, 담담하게 울리는 주수인 파이팅!
테스트를 받는 중, 다른 여자가 있었다. 미국에서 선수를 했나 봐. 테스트를 받기까지 쉽지 않았나 봐. 진태가 작게 읊조린다. 여자 선수들이 나올 때마다 선수 대기석에서는 조소가 넘친다. 그 와중에 주수인을 향해 일면식도 없는 그 여자가 외친다.
"주수인, 파이팅!"
여기까지 왔을 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끝까지 설득력 있게 흘러갔다. 주수인의 고등학교에 여자선수가 입단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시작 아닐까? 주수인이 수많은 분노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담담하게 믿고 나아가는 모습이 멋있었다. 내가 먼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한 발 한 발 나아가 준 이야기에 응원을.
#추신
픽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수인이 입단 테스트를 받았던 SK 와이번스에 호감이 생겼다. (검색해봄)
주수인 연기가 매우 좋고, 특히 목소리 톤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이주혁의 연기도 좋았다.
염혜란은 보편적인 어머니상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엄마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 현실을 자꾸 깨워준다. 두 배로 힘든 주수인의 상황을 잊을 만하면 깨워준다.
주수인을 따라다니며 응원을 하는 선수의 응원도 기억에 남는다. 시종일관 선수로서 그녀를 대한다.
존경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끄트머리에 몰린 사람들이 있다.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 훈련을 돕는 어른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까지 해온 것을 어느 순간에는 알고는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해주는 엄마와, 자신의 인생은 실패한 것 같지만 딸에 대한 기대를 한 순간도 저버려본 적 없는 아빠. 이 두 가지로 그녀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가게 된다.
여자라서, 라는 벽에 부딪힐 때 그 이유만으로 그만두지 않게 되기를.
저만의 다른 방법을 찾는 여자들이 많아지기를.
그 거대하고 두루뭉술한 벽을 깨고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손에 쥐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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