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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글

2월 초

_봄밤 2021. 2. 12. 21:25

1월 말까지 평가 자료를 준비했다. 일주일 남짓이었다. 늦게까지였고, 잠을 잘 자지 못했고, 마감이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으로 버텼다. 잠을 빚졌다. 잠은 잠으로만 갚아지는 것 같았다. 2월이 되어도 하품이 잦았다. 

 

2월 초에는 은행에 갔다. 잠이 모자란 어느 날의 일이었다. 은행에 가기까지 많은 일이 필요했다. 인감 도장을 만들고, 주민센터에 가서 인감을 등록하고... 증명서를 받아서 은행에 제출하기까지. 주민센터에 50분 정도 있었다. 대기는 없었는데 인감도장을 등록하고 증명서를 떼는 일이 길어졌다. 지문 등록이 안돼서 왼손 약지까지 스캔을 떴다가, 옆자리에서 다시 지문을 등록하고... 이것 저것이 잘 안되었는데 나보다 더 안된 사람은 아마 내 민원을 처리하고 계신 공무원이었다. 그도 50분이나 인감 하나를 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민센터의 기기가 최상의 조건이어야 함을 그날 알았다. 그러는 와중에 내 오른편과 왼편의 민원인은 바뀌었다. 오른쪽에는 증명서를 떼러오신 아주머니였다. 혼인관련 증명서였던 것 같은데, 그 와중에 그분의 이혼 얘기도 나오고, 호주제 폐지 이전과 이후의 법령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결론은 증명서를 뗄 수 없었다는 거였는데, 한 20분 넘게 민원인과 공무원 3분이서 마음이 상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누구도 무엇을 얻지 못하고 지는 게임같았고, 나는 그게 어쩐지 결혼 때문인 것 같았다. 

 

왼쪽의 민원인은 외국인이었다. 단어 사이에 영어를 섞어 썼다. 일자리를 찾으러 왔는데, 주민센터의 일이 아니었는지 2층을 안내했다. 그러자 외국인은 어제 2층에 다녀왔다고 답했다. 아... 주민센터는 민원인으로 넘쳐났고, 외국인의 일자리를 안내하는 일은 권한 및 책임 밖인 것 같았다. 그 외국인과의 대화는 1분도 안되어 종료되었다. 언젠가 낯선 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관공서를 찾았다가 거절당하고 나설 수 밖에 없었던 나를 보는 것 같았다(물론 그런 경험은 없다). 그리고 곧 증명서를 뗄 수 있든 없든 주민센턴에서 30분이나 씨름할 수 있고, 50분이나 내 인감 증명서를 떼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굉장한 특권이란 걸 알았다.  

 

우여곡절끝에 난생 처음 인감증명서를 떼고 은행에 갔다. 대출약정서를 받아왔다.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점심을 김밥으로 때우고 회사에 갔다. 오전 반차가 끝났다. 

 

그리고 2월 중순. 

그러니까 한 10여 년 전에 알아챘다. 나를 이루는 것의 반쯤은 불안이구나. 불안이 출렁이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요새는 목까지 불안이 올라온다. 작은 돌부리만 건너도 울컥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또 이렇게 많을 필요는 없는데. 이 파도가 가라 앉고 다시 반쯤만 불안했으면 좋겠다. 마음이, 좀 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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