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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연년세세>를 읽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등산화'이다. 등산화를 통해 엄마와 자식들, 특히 첫째와 엄마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등산화는 단편 소설 2개에서 다른 시차로 나온다. 

 

1. 이순일은 둘째 딸 한세진을 데리고 할아버지묘를 파묘하러 간다.

이순일은 등산화가 필요해서 큰 딸 한영진의 것을 가지고 나왔다. 막상 쓰려고하니 삭아서 밑창이 떨어져 나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이순일은 그것을 거기에 버리고 온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큰 딸은 등산화가 있는 줄도 모를것이다. 저렇게 삭아서 망가져 있을 것도 모를 일이었다.

 

2. 몇년 후, 한영진은 함께 일하는 백화점 동료들과 주말에 산에 가기로 했다. 한영진은 등산화를 찾는다. 아무리 찾아도 등산화는 나오지 않는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몇 번 안 신은 새것이다.

 

3. 이순일은 거기 어디쯤 있을거라고 말한다. 아뿔사. 예전에 망가져서 버릴 수 밖에 없었던 등산화를 생각해 낸다. 그리고 아래처럼 역정을 낸다. 


"마침내 이순일은 몇년 전 지경리 논바닥에서 망가진 등산화를 기억해냈다. 끈적한 진창에 들러붙어 밑창이 떨어져나간 등산화 한켤레를. 이순일은 화가 나, 냄비 속을 젓던 국자를 돌아서서 한영진에게 외쳤다. 너는 그걸 왜 이제야 찾아. 쓰지도 않고 박스에 담아 두고 삭을 때까지 그대로 두더니 왜 미련하게 너는 이제야 그거를."


4. 한영진은 화를 낸다. 


"왜 그랬느냐고 한영진은 물었다.

말도 안 하고 내 걸 쓰고, 그걸 거기 버리고 았냐고.

내 거를. 

...(중략)

이순일은 그것이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 장면은 이순일이 등산화를, 더 좋은 등산화를 산다. 보통 한영진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데, 여기서 소설은 이순일의 마음을 살피며 끝난다.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왜냐면 '그런 것'이 그녀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70살 넘은 이순일에게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것은 한창 일하고, 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키우는 한영진에게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읽으면서 나도 그랬다. 왜 아니겠는가.

복잡한 감정이 겉으로는 새 것이지만 속으로는 다 삭아서 신을 수 없는 등산화로 다 드러나 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등산화 정도는 빌릴 수 있는 거였다. 잘 써놓고 가져다 놓으면 되지. 그런데 그게 삭아있었다. 엄마에게 하등 도움이 안된 등산화. 걔는 이걸 새 것이라고 잘도 갖고 있었지. 정작 어디에 있는줄도 모를거면서. 언젠가 신고나가 창피를 겪을지도 모르는 일, 그걸 대신 내가 겪고 버려줬다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 같다.

 

딸의 입장에서는 그게 새거든 밑창이 떨어지든 말든 그걸 왜 말도 없이 가져가서는 거기 버리고 온단 말인가. 내가 쌓아온 티끌이라도 나의 재산인데, 엄마가 그걸 말도 없이 가져가 놓고는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서로 하지 않는 말을 곱씹는다. 말하지 않는 것은, 용서가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황정은은 이런 걸 참 잘 아는 것 같다. 그건 늘 처지와 관련된다. 처리를 이해하는 데서, 너무 이해하는 데서 넘어온다.

니가 대체 뭘 알아. 라고 금을 그어버리고 아무렇게 이해되는 것들에 대해서. 


연휴에 지금으로부터 5년 후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내년에는 집을 사고, 하반기에는 차를 사고, 그러면 대출금이 얼마고, 나는 얼마를 벌게 되고, 그런 것들. 20대때부터 그렸던 인생 그래프의 일환이다. 그 전까지는 대개 과거의 것을 그렸다. 그 옆에 친구들도 써놓고, 언제쯤 소원하게 되었는지도 적는다. 그래프가 끝난다. 이 사람은 여기까지 왔다. 이 사람은 여기서 만나서 벌써 5년이 되었다. 어떤 해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되었는지, 새로운 것을 보았는지. 이번 연휴에는 앞으로의 그래프를 그렸다. 내 것만 적다가, 

 

그 옆 칸에 부모님의 나이를 함께 써 놓았다. 숫자가 하나씩만 늘어나는 데도, 두 배로 불어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숫자가 적혔다. 

또 그 옆 칸에 동생들의 나이를 써 놓았다. 부지런히 나와 비슷해지고 있었다.

동생들은 결혼을 하게 될까?

우리 고양이의 나이도 써 놓았다. 장난감을 들고 나가서 당장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드셨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엄마아빠의 지금 내 나이가 나왔다. 

그러니까 도대체 언제, 이런 나이가 된거야. 생각해볼수록 20대, 30대의 나의 일만 기억에 남았다. 당장에 여행을 가야할 것 같았다. 엄마가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내후년에 이탈리아에 갈 수 있을까? 올해가 가기 전에 집을 리모델링해야 한다고, 올해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지 감도 오지 않는다고. 더 미룰 수는 없었다. 미룬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일들이었다.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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