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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문예반 선생님께서 책을 한 권 주셨다.
언제부터 문예반에 들었었는지 모르겠다. 특별히 무슨 활동을 했던 것이 아니다. 어느 날 오후 갑자기 2-1반이 '문예반'으로 바뀐 교실에 들어가 한두 시간 책을 읽은게 최대한의 활동이었을까. '재미'라는 말을 묻는다면 가차없다. 뭐니뭐니해도 방과후에 남아서 뺑뺑이를 타거나 오징어를 하는게 재미었으니까. 그리고 무슨 활동이라고 한다면 6년 통틀어 나를 가장 오래 잡아놓았던 것은 경시대회반이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연필을 굴리면서 문제를 풀었고 갱지 연습장을 펴놓고 무슨 영화의 주인공처럼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새장 속에 새를 이해한다' 따위의 낙서를 끄적였다. '감옥'을 상상했다.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문예반을 기억하는 일은 조금은 '특별한 까닭'이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문예반이라고 써 있는 곳에 가서 책을 좀 읽다가 나오는 게 다였으니. 낮은 책장에 오늘은 뭘 읽을까, 세계 명작 같은 것을 골라다가 좌탁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읽었다. 가끔은 시를 쓰라고 해서 썼는데, 산이 하늘하고 가까워져서 붉어진다는 내용의, 지금 쓰면서도 얼굴이 다 붉어지던 것이었다. 턱을 괴고 원고지 칸을 세면서 사이가 참 넓다 생각했고 잘 깎인 연필로 글씨를 그 칸에 글씨를 좀 그렸다. 얼토당토 하지 않게도 어느날은 산이 뾰족해서 하늘을 찌르니 아프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좀 했고 하굣길 그게 걱정인 날들도 있었다.
문예반 선생님과 가깝지 않았다. 가끔 무슨 책을 읽느냐며 물어보시면 '이 책'이라고 대답하는게 다였다. 그러면, 선생님은 빙긋 웃으시고 자리를 뜨셨다. 원고지를 주며 무엇을 쓰라고 했지만, 그걸 집요하게 받아내거나 다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잘 알지 못했다. 이름과, 단발머리와... 그 정도. 그래서 졸업식 날은 더욱 의외였던 것이다. 담임을 맡은 적도 없었고, 문예반 활동은 활동이라고 하기에 비정기적이었고 활동이 화려하거나 끈끈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졸업 때 누가 또 선물을 받았을까? 잘 생각나지 않는다.
선생님께서 졸업 때 주신 책은 <좀머 씨 이야기>였다. 안쪽에는 말씀이 있었다. 사근사근한 얼굴과 달리 마냥 아름답기만한 문구는 아니었고, 순한 결이었으나 한눈에는 알아듣지 못하도록 엄함을 품고 있었다. 그 책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이렇다. '그런 책을 처음 봤기 때문에 기뻤다' 그러니까, 열 세살에게도 느낌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종류의 책은 내가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의 책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 같다. 시골학교 작은 도서관과 한 시간이 걸리는 읍내의 서점에서도 아마 찾을 수 없었으리라는 확신이. 그 다음으로는 생각치도 못한 의외의 분께 받아서 놀랐던 기분이 왔다. 졸업이라서 무슨 사전들 틈바귀에서 이렇게 예쁜 책을 받았으니 말이다. 조금 커서 생각하니, <좀머 씨 이야기>를 초등학교 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아주 좋았던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 때까지도 좀머 씨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쓰니 조금 참혹한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는 나처럼 혼자 좀머 씨를 읽고 있었을거라고 해두자. 하여간 좀머 씨는 나만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은둔했고 자신을 알리는 일은 금물이었다. 조금 더 커서도 <좀머 씨 이야기>를 모두 이해한다고 한다기 보다 키가 큰 나무를 잘 타던 맨발과 피아노를 배우던 곳과, 코딱지와 뭐 그런걸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같다. 좀머 씨의 드러난 다리가 황갈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하얗게 돌아오는 계절을 함께 났다. 그러던 어느날 좀머 씨의 가슴팍까지 물이 차올랐을 때, 그때까지도 멈추지 않던 좀머 씨의 걸음 뒤에 나도 숨죽여 있었다.
차가운 물은 어떤 느낌으로 살에 닿는가, 책을 덮는다. 나는 책 밖에 있지만 좀머 씨는 저 차가운 물속으로 숨고, 또 비치지도 않도록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좀머 씨는 왜 혼자 있는가. 혼자 있으려는 좀머 씨를 혼자 두지 못해 어쩌지를 못하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알자면 우선 이름도 어려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삶과 그가 통과했던 시대와, 그러니까 독일과, 전후와, 그러자면 또 세계와, 그곳에서 '사람으로 사는 것'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를 늘여놓자면 아직도 좀머 씨를 이해하기에 내가 품어 온 폭이 너무나 좁은 것이다. 나는 다시 책을 처음으로 피거나 앞장으로 두었다. 좀머 씨를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와서 다음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좀머 씨 이야기를 '그때' 받았다는 것은 문예반 선생님이 나를 얼마간 믿었다는 얘기로도 풀이할 수 있다는 점을. 좀머 씨 이야기는 성장소설의 외피를 갖고 있지만 결코 이해에 쉬운 책은 아니므로. 그러나 너라면 그 책 한 겹은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을것이란 믿음.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에게 자신의 안목으로 고른 책을 기꺼이 줄 수 있다는 '웃음' 같은게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 감정에 모두 부합했는지는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 나는 수월하게, 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번 질리지 않고 <좀머 씨 이야기>를 읽었다.
문예반 선생님은 조금 수줍은 목소리였다. 마른 몸에 키가 큰, 젊은 여선생님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또 모르겠으나, 나를 "빨간머리 앤"이라고 부르셨다. 그럴때마다 솔직히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좋았다는 감정이 앞에 왔기 때문에 망설였단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빨간머리 앤은 고아였고 나는 부모님 밑에서 사랑받는게 자랑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좀 슬펐다. 어린 나이에도 (물론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을테지만)앤이 가진 재능의 일부는 불우한 환경에서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욕망과, 그렇기에 더욱 막힘없이 사랑을 상상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을 우선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모른다. 물론 빨간머리 앤이 가진 명석함과 씩씩함, 공상과 글을 썼던가? 그런 것에 빗댄것이었겠지만. 나는 빨간머리 앤이 너무 너무 좋거나 무척 닮고 싶거나 하지는 않았다. 앤은 멍청한 순간도 많았다. 머리를 초록색으로 염색했을 때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앤의 발랄함과 몽상과 웃음을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기 전에 그녀의 사고뭉치와 엉뚱함이 부르는 실수, 계속되는 잘못과 잘 우는 것, 그런 것이 더 가까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건 좀 어처구니없지만, 앤보다 다이애나가 더 예뻤다는 게 또 망설임의 한 축이었다. 솔직히 빨간머리 앤보다 내가 더 예쁘지 않나. (사실 이게 핵심인 듯 하다) 이렇게 혼자 생각하면 마음 속에서 빨간머리 앤도 예뻐! 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하면, 노래는 왜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고 부르는건데. 짱짱한 펀치가 오갔다. 하여간. 그렇다고 그걸 누구에게 물어본 적은 없다. 다행스럽다.
이런 고민은 모르시고 그렇게 부르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음을 좀 멈칫거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좀머 씨 이야기>에도 이렇게 쓰셨다. 줄이 바뀌어 웃음 가득한 글씨였다. <빨간머리 앤! 길버트 같은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연락하렴.>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 선생님을 한번도 뵙지 못했다. 연락을 한 적도 없다. 어째서였을까. 한 번은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지난한 시간을 지나 생각하니 그게 다 무던무던했던 문예반의 활동탓이었다. 아꼈을 테지만 아낀다는 티를 내지 않았던 선생님의 수수함도 얼마간 있다. 아이답게 한번을 엥기거나 묻거나를 좀처럼 않던 어색한 어른스런 탓도 있었다. 길버트 말입니까?! 그 잘생기고 앤을 괴롭히고 울타리를 잘 넘나들던, 하지만 남자친구는 무엇인가, 남자친구란 이름은 알지만 그게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던 때였다. 시간이 지나서 (참내) 이십년이나 지나서 그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길버트 같은 남자친구는 이제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은데. 그가 선명해질수록 내가 빨간머리 앤이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빨간머리 앤이 아니다. 닮지도 않았고 예쁘지도 않다. 내겐 그렇게 환한 힘이 없다. 그렇게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를 힘들여 적을 수 있을 뿐. 선생님,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빨간머리 앤이라고 부르셨던 그 때 그 아이를. 그 뒤로 나의 한 때, 빨간머리 앤이라고 불렸던 사실은 없습니다. 그걸 기억하는 이도 없어요, 당사자도 어렵게 가물가물한 걸 붙잡았던 모양이에요. 그날들에 다행스럽게도, 내게 머문 좀머 씨, 만이 이 모든 걸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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