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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맛

그를, 기다림

_봄밤 2014. 9. 20. 19:13




그곳에 앉은 사람에게 자유로운 공간은 본인의 손바닥에서 발 끝까지. 편하게 바라볼 거리가 없기에 모두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갈라지는 손금, 피하지 못했던 사정들. 안타까움을 외면하고 반짝이는 화면을 오래 본다. 어딘가 오래 시선을 둘만한 곳이 없는 것은 유대가 없다는 뜻도 될까. 시선을 들키면 그 옆, 또 그 옆으로 도망하는 눈이 있을 뿐이었다. 그날은 정오였다. 지하철 칸 안으로 해가 바닥에 어른거렸다. 아지랑이, 그녀는 이부자리가 흐트러진 며칠을 보냈다. 그런 날은 몸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일어나서 심하게 구겨진 요를 내려다 보는 소일을 며칠 갖다가 그날은 요 위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한 시 다 되어 오른 지하철에는 다복하게 의자를 나누어 앉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다정하게 마주침 피했다. 부대낌 없이 빈자리가 종종 있었다. 그 중에 하나를 앉는 일은 아주 쉬웠다. 이제 곧 별일 없이 따분한 사십여분을 보낼 참이다. 무릎에 별 일 없는 책 하나를 펴 놓고 있었다. 펴 놓기만 할 뿐 한 문단을 읽었을까. 그녀는 그냥 그런 무게를 올리는 일이 좋았다.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어폰을 꽂았다. 역시 아무것도 안 듣는다. 건너편을 천천히 좌에서 우로 살피니,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어쩜 이렇게 생김이 다 다르고 고개를 꺾는 각도가 다르고 이마의 볼록함, 광대가 울씬거리는 모습이 다를까. 그녀는 이 건너편 지하철의 복도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바랐다. 공책을 펴고 이 사람들을 모두 그리고 싶어했다. 그런 생각은 거의 매일 들었고 거의 매일 포기했다. '사이'가 너무 가까웠으므로.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포즈를 내맡기는 일은 불편한 일임에 분명했으므로. 


공기가 바뀌었나, 아무 변화도 느끼지 못할 무렵 저 멀리서 천천히 오는 사람이 있었다. 목적지는 빈자리?  다음 칸? 알 수 없었다. 무척 천천히 오고 있었다. 오후의 졸음은 그런 박자에 잠을 자기 쉬었다. 조는 고개들. 이윽고 그녀 앞에 도착한 걸음은 다리를 심하게 저는 남자였다. 인상이 잠겨있었다. 오래 풀지 못하는 얼굴로 걸어왔다. '한 걸음'을 다박하게 구분짓기 어려웠으니 천천히 통로를 지났다고 해야할 것 같았다. 그는 무어라 말을 내었으나 무슨 말인지는 미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사이좋게 자신의 몸만큼 자리를 나눠앉은 무릎들 위로 볼펜을 띄엄띄엄 내려놓았다.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알 수 있었다. 볼펜이 도착했다. 그는 지나갈 것이다. 누군가는 지갑을 열 것이고 누군가는 볼펜과 무관하게 자신의 자세를 지킬 것이다. 남자는 그녀를 지나쳤다. 대신 그녀 옆에 앉은 여자에게 볼펜을 주었다. 여자는 그 옆에 앉은 다른 여자와 친구였는데, 이 볼펜을 들고 말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고 볼펜의 뭉뚝한 끝을 잠시 살피는 듯 했다. 친구들 역시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늘의 날씨와 조금 후에 내려 먹을 점심에 대한 기대가 들떴다. 그가 지나갔으므로. 다시 공기는 건조하고 평이하게 흘렀다. 그녀 역시 무엇을 느꼈던 마음을 잊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건너편 까만 창으로 보이는 앞머리를 살피다가, 조는 사람들 무릎으로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작은 볼펜을 힐끔거렸다. 볼펜이 궁금했던 것일까. 그것을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궁금했던 것일까. 얼마쯤 지나서 남자는 반대편에서 한 걸음, 씩 그에게는 분명한 걸음을 내며 도착했다. 다리를 심하게 절며, 표정을 더는 일그러트릴 수 없는 얼굴로.


이번에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띄엄띄엄이나마 셀 수 있었다. 그 칸의 누구도 돈과 교환하지 않았다. 그는 볼펜을 무심하게 건네는 손마다 가벼운 목례를 했다. 그녀 옆에 앉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특이하게 여자는 두 손으로 건넸다. 그녀는 그가 지나가는 것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그는 지나갈 것이고,  자신이 줬던 볼펜을 다시 회수해 갈 참이었다. 흰색 티가 유난히 환했고, 그냥 걸었더라면 꽤 넓은 어깨를 갖고 있을 '청년'이었다. 


그리고 몇 정거장을 지나 그녀 오른편에서 신문을 보고 계시던 아저씨가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서 내리는 곳에 섰다. 이 몇 초 사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 물건이 떨어졌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황급히 살피니 볼펜이었다. 청년이 미처 회수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저씨가 건내지 않아 몰랐을 것이고, 청년이 기억하지 못한 것이었고, 아저씨는 내렸고, 빈 자리에 볼펜이 잠자코 있었다. 청년은 사라졌고, 아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나 바로 그 다음역은 그녀가 내릴 곳이었다. 


역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에는 볼펜이 쥐어져 있다. 햇빛이 좋았고, 얼굴 위로 따끔하게 어른거리는게 가을이었다. 볼펜을 쥐고 걸었다. 만나야지, 만나서 값을 치뤄야지. 했던 생각이 일 주일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아 그녀는 걱정이다. 어느날 정오에 그 칸에 올라 그를 만나야지. 그날부터 빌린 볼펜을 보여줘야 한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일을 기억하기로 했다기다림을 기억하며 볼펜을 오래된 필통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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