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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 여러분, 자신은 우연히 일본에 태어났을 뿐이며 ‘일본인’일 생각은 없다든가, 자신은 ‘재일일본인’에 지나지 않는다든가, 그런 가벼운 말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들이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에서 얻은 기득권과 일상생활에서 ‘국민’으로서의 특권을 내던지고, 지금 바로 여권을 찢어 자발적으로 난민이 되는 기개를 보여주었을 때만, 그 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타자’는 당신들을 ‘일본인’으로 계속 지목할 것이다. 262p
『언어의 감옥』 에는 계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재일 일본인의 언어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그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모어로서의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나서 자랐던 곳의 냄새와 물성에 ‘일본인이세요?’라는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언어에 갇힌다’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있었던 시대로부터 그는 밀어 넣어졌다. 그리고 그를 가두었던 시대는 그와 함께 계속 살아지고 있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열리지 않는 감옥, 지나간 시대의 살아있음이 이토록 명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표지를 살피면 일본어와 우리말이 섞여 알 수 없는 글자의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얇은 감옥을 한 장만 넘기면 겁 없이 읽어 갈 수 있는 우리말이 있다. 그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 그에게는 평생을 다 해도 결코 가 닿지 못 할 우리말의 층위가, 어느 때 보다 더 확실한 벽으로 다가왔다. <언어의 감옥>. 묵직한 책을 펼친다.
이 책은 탁한 눈을 밝은 불빛에 비추어 동공을 똑바로 비춘다. 우물쭈물하는 입모양을 제대로 벌리게 한다. ‘아’라는 발음을 아와 우의 사이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아’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들의 논리에 숨어있는 비겁함을 읽는다. 명석한 머리로 그럴듯함을 내세워 빠져나가려는 이들에게 옳음이 무엇인지 얼굴에 들이민다. 그러나 바른 것을 말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우선 모어인 일본어에 갇혀서 거의 일본인에 다름없는 사유체계를 반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는 일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치열한 일이었을까 생각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변방의 목소리다. 식민주의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당시의 한국인도 이보다 더 치열하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가 짚는 탁한 눈과 우물쭈물하는 입은 이런 것들이다.
전쟁의 승산이나 정당성에 의문이 있는 병사가 전쟁터로 향할 때 그 고뇌는 훨씬 깊은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징병에 응한 아버지, 할아버지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항일전쟁에 뛰어든 중국 사람들이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조선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253p
이것을 읽고 놀랐던 것은, 일본인이 갖는 생각의 피폐함의 정도였다. 윤리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을 자랑하는 것이 놀라웠다. 이렇게 한심한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고, 논리와 감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며 식민지의 일을 두루뭉술하게 넘겨 버리는 천진한 행태에 놀랐다. 일본인들의 허약함이 이정도 일 줄은 진실로 몰랐다.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반박할 힘이 빠지는 글에 대해 그는 한 줄 한줄 정성스럽게 되물으며 따진다.
폭력단 두목을 위해 치르는 말단 조직원의 자기희생은 당사자의 나르시시즘에는 적합한 행위일지는 모르나 적어도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잘못된 목적에 바치는 자기희생은 바보스럽고 애처로울 뿐이다. 하시즈메는 추상적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이 그 자체로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지만 국가가 바로 대의는 아니다. (...)
“항일전쟁에 뛰어든 중국 사람” 운운하는 대목은 일견 하시즈메의 설과 초보수파 간에 일정한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침략한 족과 침략을 당한 쪽 모두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하시즈메가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마찬가지라 하는 것은, 결국 일본이 일으킨 저 특정한 전쟁의 성격을 전쟁 일반으로 해소해버려 ‘침략전쟁’으로서의 본질을 가리고자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전쟁에 참여한 할아버지, 아버지”라고 해도 그 내용은 여러 가지다. 그런 행위를 모두 똑같이 ‘긍정’하라고 하시즈메는 역설한다. 하지만 A 급 전범의 책임도 최말단 이등병의 책임도 다 같이 ‘긍정’하라는 것일까? 이처럼 조잡한 ‘포괄적 논법’에는 전쟁법죄인을 말단 병사의 무리에 끼워 넣어 그 죄를 감면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254p
그리고 그는 죄와 책임에 대해서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온다.
아렌트는 개개의 행위의 ‘죄’는 개인으로 귀속되지만, 공동체의 성원(국민)에게는 언제나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부과된다고 논한다. 다시 말하면 ‘난민’이 되지 않는 한, 한 국가의 국민을 그만둔다고 해도 어딘가 다른 국가의 성원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렇게 되면 다른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292p
이것은 일본의 문제만이 아니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지역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죄와 보상이 오랫동안 묵살되어 온 것은 전세계전으로 제국주의 지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식민지 지배 책임의 부정이라는 것은 선진국이 국제적으로 연계해서 깔아놓은 공동의 방어선이라는 것이다. 자명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이는 과거의 일이 자신의 나라 하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의 하얗고 친절한 얼굴 뒤에는 그들의 연대, 과거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지금을 계속 유지하려는 음험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식민지 지배 청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단지 한국과 일본의 일을 넘어서 세계사적인 의의를 갖는다고 덧붙인다.
역사를 아는 것은 '알고 있음'에서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이 불러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과거라는 감옥에 가둬 놓고 있다. 내가 사는 시대에 구태여 오래전을 떠올리지 않는다. 생각하기 불편함. 지속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움. 혹은 귀찮음으로 치환되는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같다. 지속되는 식민주의 지배의 문제-위안부, 교과서의 논란에는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논리에 힘빠진 표정으로 바라볼 뿐인 포즈에도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어야할 포즈는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정성스럽게 반박하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너무 안일했던 것은 아니었나. 제대로 모습을 짓지도 못했던 것이 아닌었나 돌아보아야 한다.
<언어의 감옥>이 주는 메시지는 과거 식민지 지배의 일과 함께 국가와 국민의 책임, 그리고 정치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세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내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국민’이라는 힘이 제대로 생겨날 것이다. 나는 지난날의 한국이 대외적으로 했던 일에 죄는 없다고 하더라도 책임이 있다. 내가 이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이고, 내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한국이라는 이름에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것이 그 책임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보편타당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를 당부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자리를 다른 큰 이름으로 그늘지게 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국가라는 거대하고 표나지 않는 곳에 숨어들지 말라고 한다. 언어라는 창살을 자유자재로 늘리며 안과 밖을 유연하게, 치열하게 사고 했던 까닭은 국적을 초월해 그가 결국 ‘사람’으로서 살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책을 덮어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섞여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표지를 다시 본다. 글자와 글자가 겹쳐서 생긴 겨우 생긴 공백이 그가 있는 자리인지 모른다. 그곳을 변방이라고 부른다. 한 언어에 깊이 안착해 있어서 '사이'를 들여다 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밖에서 치열하게 사고 하기의 좋은 예다. 역사가 과거로의 일로 봉인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시간을 계속 엮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그 하나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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