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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치다 '노름마치', 그리움의 재발견
우리는 몸의 언어를 잃었고 이것을 재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루돌프 라반,『동작의 완성』*
‘사무치다’라는 불가능한 말의 이해
책머리 ‘사무치다’라는 말을 불러왔다. 자연스럽게 ‘그리움’을 뒤따르게 하는 이것은 오래되어서 오래 쓰이지 않았다. 요샛말로 알란가 몰라, 사무치는 일은 살아-묻히는 일임을. 그러나 ‘사무치다’라는 말 풀이 알아도 ‘살아-묻힌다’는 말 뿌리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살다가 묻히게 되는 것’은 아무리 가까이서 보아도 알기 어려운 ‘누군가의 평생’ 아닌가.
우리는 ‘누군가’의 평생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누구라도 끝내 알 수 없는 일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사무치다’를 온전히 발화할 수 없다. ‘사무치다’는 쓰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쓰일 수 없던 말이었다. 그런데 여기, 살아 있는 사람 진옥섭 '사무치다' 말한다. 그가 부르는 그리움, 어떤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가벼운 표지를 넘기면 춤을 추고 혼을 부르고 작두를 타고 북을 치는 촌네들의 모습에 놀란다. 표지 들썽이지 않는 그네들의 인내가 놀라울 뿐. 손을 타며 넘어가는 책장은 갈피마다 곡哭이 배어있다. 진옥섭은 이해보다 먼저 울어오는 '몸의 언어'를 받아썼다. 독이라도 드는 듯 쓰디써서 좀 흔들어 털어주고 싶은 말. 이것은 그런 말 쓰게 했던 18인의 이야기이다. 이분들 없었으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깻죽지 올리고 허공에 발 구르는 글자
표지의 노름마치, 장단 없이 춤추는 글자를 보았나. 힘껏 팔을 뒤져 어 내달린 '노', 사뿐하게 받아치는 '름' 작고 가벼웁게 허공을 구르는 '마치'. 이제 더 이상 땅과 상관없는 글자 되었다. 다음 판이 무의미해지기에 자리를 마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노름마치' 그 이름 두꺼운 바늘로 단단하게 엮고 정갈히 올렸다. 길 험한 곳마다 다르게 피었던 노랫가락과 춤사위 지금도 어느 촌막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인가. 일어났던 것이다. 황톳길 먼지 나리고 땀 훔치며 쓴 보도자료가 소리한다. 기억해 내라는 소리 본 편 가기 전에 이미 한 소리다. 어렵게 출연한 분들의 이름이 짓밟힐 때마다 맹세했었다. 언젠가 기필코 깨끗한 책을 지어 바치겠다고. 그간 공연을 벌이는 틈틈이, 기둥에 머리를 쾅쾅 박으면서 발버둥친 결과를 엮었다. 그 소리 예사롭지 않았던 것은 책 엮는 자세가 이미 땅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읽는 이는 저 모르게 꼿꼿이 등을 편다.
여섯 갈래 길 돌고 돌아 다시 그리운
책은 여섯 갈래로 길이 나있다. 각기 예기藝妓, 남무男舞, 득음得音, 유랑流浪, 강신降神, 풍류風流, 이름도 걸쭉하니 한번 들어가면 진득하니 눌러 있고 싶은 곳이다. 갈래 길 돌고 나니 팔도 민속 다 훑는 듯했다. 한 백 년쯤은 우습다.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밟아와 그분들 출생을 박고 한 땀 한 땀 짚고 나서야 그들의 몸을 읽는다. 그네들의 삶 없이 몸이 부르는 말 소용 없기 때문이었다. 삶을 꼬나든 시대와 집안의 가난과 주변의 멸시가 있었고 징한 사랑의 실패와 길 모른 유랑流浪이 있었다. 그래도 나가면 좋았던 판, 감출 수 없이 타오르던 소매가 좋을 때 다 보내고 다시 피어올랐다. 눈물이 마른자리가 켜켜이 쌓여 마침내 투명한 꽃잎이 한꺼번에 피는 얼굴. 말 잇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갈래 길 중 유랑流浪에서 만난 흰옷 입은 심청 엄니, 공옥진을 적어본다.
길 초입 들어서면 보도자료를 나눠준다. 이 종이 들고 얼얼했다. 초입부터 울울했다.
...그래서 준비한다. 예전 화장품 외판원들이 나눠주던 하얀 가제수건. 그리고 때가 되면 변사의 신호라도 들은 듯 일제히 꺼내 든다. 순간 굿판은 송이송이 하얀 송이 터지는 목화밭이 된다. 옳거니! 심청의 슬픈 노래가 할매들의 흐린 눈을 눈물로 닦아 밝히는 것이다. 심청, 이미 벌써 신통한 신이다. 259p
한바닥 남짓 보도자료, 목화로 피어나는 하얀 가제수건의 마술과 공중에 멈춘 굿판을 보았다. 마지막 장면만으로도 할매 손 따라 굿판 끄트머리에서 울음을 되삼키는 내가 보인다.
보도자료 들고 주억거리며 들어간 동네에 공옥진 여사를 찾는다. 첫 만남.
티 없는 웃음 앞에서 오금이 저렸다. 만백성이 다 아는 광대, 그러나 현찰을 보퉁이로 싸와도 다 물리고 갯벌에서 바지락을 캤다. 대학생들이라면 나라의 기둥이라고 출연료도 묻지 않고 출연했지만, 흥행사는 열에 아홉을 거절했다. 261p
소탈을 따라가다 눈물을 따라간다. 현찰 보퉁이도 마다하는 것을 옛사랑 그림자를 불러와 고부라진 손 꽉 잡게 하는 모습은 옮기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의 노래를 틀어 마음을 움직이는 이나, 그것에 쏠려 제 숨을 불어 넣는 이나, 둘이 맞아야지 장면이다.
선생의 숨 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보도자료는 눈물에 번져서 글씨 알아 볼 수 없다.
"여러분 옥진이는 아버지를 징용에서 빼려고 여덟 살에 천 원에 팔려 일본에 갔습니다." 267p
죽은 자를 던져 넣은 구덩이 위에 서서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진 육신의 허망함을 내려다봤다. 스스로 서러워 마지막 남은 짧은 시간에 긴<육자배기>를 불렀다. 그 처연한 노래가 죽을 목숨을 건졌다. 265p
따라왔는가. 거기서 숨죽여 뭐하시는가. 이제 공옥진의 <심청전>을 볼 차례다.
...공옥진의 창무극 <심청전>에는 장치도, 분장도, 조명도 없었다. 치레도 없이 장단 앞에 선 단독자로 자신을 제물 삼아 벌인 제의였다. 한과 흥을 한 갈래로 꼬아 등신불처럼 제 몸을 살랐다. 분장도 조명도 거부하고 오로지 배우의 몸으로 거기 박힌 윤곽과 근육을 움직여 극을 전개했던, 폴란드의 연출가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과 같았다. 268p
공옥진의 창무극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이해를 구한 장면은 다름 아닌 폴란드의 연출가가 올린 극이었다. 그나마로 닿으니 다행이랄지. 유일무이한 이분의 비교를 영영 잃을 뿐에야 어디라도 끌어와 이해시켜야 한다. 공옥진, 유명인과 마을의 이웃을 겸했던 분. 작년 7월 타계로 그 끝을 더 늘려 쓸 수 없다.
‘예술이나 전통, 우리’ 올리지 않아도 ‘노름마치’
그들은 ‘예술’ 하자고 속을 뒤집었던 것 아니다. ‘전통’이란 말은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우리’의 것이라는 말은 이제 그만하자. ‘노름마치’들은 예술이나 전통, 그리고 ‘우리의 것’을 불러 간직했기 때문에 기억해야 하는 이름 아니다. 그들은, 몸의 말을 몸으로 이어야 함을 생래적으로 알았던 사람들이다. 시간이라는 무력한 손님 앞에서 사라지고야 마는 목숨 이으려 자신의 삶을 통째로 먹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읽히지 않아 오래된, 감히 발화될 수 없는 ‘사무치는’ 몸의 말을 생 전체를 들여 저 골목골목 쏟아 놓았기 때문이다. 길 건너와 쇠한 몸은 가물가물 하고, 그것 이어 받을 사람 가물어 간다는 것 모르는 ‘우리들’이 서 있다. 몸과 몸 사이 ‘무엇’을 통해야만 대화가 가능한 우리들은 ‘몸의 언어’는 물론이거니와 몸의 언어를 몸으로 ‘잇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어 잊었다. 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말 잃어버린 몸뚱이 어떻게 짊어지고 살 거냐. 도는 피 속에 잠든 그리움을 어찌 안고 갈 거냐. 그것이 걱정인 것이다 진옥섭, 사무치게 걱정인 것이었다.
그의 안내로 몸으로 하는 말이 어떻게 살아-묻혔는지 책 속에 벌어진 판 귀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보았다. 울먹이게 생생한 판치는 모습. 책을 다시 피면 꼭 같은 자리, 공중에서 하얀 가제수건 목화로 꽃 피는 것을 본다. 시간을 멈춰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꽃. 분명히, 실제로 본다면 기척도 없이 혼 나가겠다. 그래도 좋으니, 피 당기는 이 판 한 번 징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뿐. 이것이 책을 덮으며 떠오른 유일한 마디였다. 한 번 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했다.
'몸의 언어'의 재발견
앞은 솜버선, 뒤꿈치 부분은 홑버선이었다. 순간 또 찌릿했다. 아! 이것이 고수의 비결이구나. 뒤꿈치로 딛고 설 때 살갗이 닿는지, 살이 닿는지, 뼈까지 닿는지 극히 예민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앞발은 솜버선을 신고 그 위에 겉버선을 꽉 끼게 신어 유선형의 외씨를 만들어야 한다. 치마 끝에 살짝 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앞은 솜버선, 뒤는 홑버선이라는 자신만의 버선을 고안해 '유혹'과 '절제'를 한켤레로 감당한 것이다. 435p
다시 제일 첫 머리, 우리는 몸의 언어를 잃었고 이것을 재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던 라반은 뒤이어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 놀라운 인체의 구조와 인체가 수행하는 놀라운 행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기적 가운데 하나다. 몸동작의 각 단계, 무게를 옮겨 싣는 것, 모든 신체부위의 모든 제스처는 우리의 속내 한 자락씩을 드러낸다.**
'거의'라는 단서로 애써 희망을 잃지 않았던 라반의 기다림과 숙고는 훌륭했다. 우리는 몸의 언어를 잃었지만, 『노름마치』는 사무침으로 몸의 언어를, 그것으로만 읽히는 그리움을 재발견했다. 타오르는 문자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우리는 속내 한 자락씩 드러내는 몸 속으로, 피가 당기는 몸 쪽으로 기울이면 된다. 그럴 땐 좀 울어도 좋을 일. 『노름마치』를 다시 펼친다.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김명주 역, 뿌리와 이파리, p.225, 재인용.
**위와 같은 책.
※각주 '*,**'를 제외한 모든 이탤릭체『노름마치』 본문 인용.
작성 : 2013/08/0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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