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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인문학포럼


2013년 5/21일 화요일 2시~4시
충남대 문원강당

<'폐를 끼치는 자'들의 존재론>의
강연 후기 입니다_



산서 장날, 조기가 부안에서 오기까지-폐를 끼치는 자들의 존재론-




산서 장날 어물전 조기들이

상자 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다

부안산, 이라 붙어 있다

부안이면 여기서 300리도 넘는 곳

나는 조기를 싣고 왔을 트럭을 생각하고

조기가 흘러와 왔을 길을 짚어 본다

 

부안 죽산 동진 김제 용지 이서 전주 관촌 임실 오수 지사 산서

 

안도현,「길 따라」 전문

 



 

 점심은 조기구이 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먹는다고 할 때 그것을 산다거나, 만들어 먹는다는 설명이 따릅니다. 하지만 시인은 조기가 오는 길을 생각하지요. 그것을 떠올린다면 이 조기가 도착해서 만들어져 상에 나오기까지 조기의 생과 사람들의 수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우는 아주 간단한 도구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돈'이라는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면, 내가 그 수고를 모두 감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마 그렇다고 해서 조기가 상에 오르기 까지의 일들이 사라지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니지요. 돈으로써 지워지는 폐는 이런 점에서 인식의 장애를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 있기 까지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나를 학교에 보내고 일을 하시는 부모님 뿐만 아니라, 내가 이곳에 있으려고 함으로써 다른 곳에 있게된 이름 모를 다른이들 뿐만 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와, 그것을 받치는 책상과, 의자와, 건물과,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수고가 모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단순히 이곳에서 무언가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폐를 끼쳤던 이유입니다.

 

 선생님의 강연은 조그마한 개울가에 모여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바닥을 보다가 어느새 바다로 밀려와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한꺼번에 보는 듯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장애가 폐가 되는 순간을 말씀하시며 돈으로 지불되면 사라지는 것 같은 폐까지. 장애란 존재자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 그러므로 장애자란, 우리의 인식의 장애를 눈뜨게 하는 존재라는 설명. 혁명은 끊임없이 장애를 만드는 문턱을 제거하는 운동이라는 말씀에 이르러선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오랫동안 문턱을 넘으려고 했던 사람중에 하나입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문턱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지우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들었던 생각들은 나는 혹시, 나의 무능력에 의해 그것을 넘지 못했다고 해서 가지게 되었던 가치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만약 능력이 출중해 문턱 너머의 사람이었다면 나는 문턱을 지우려고 했을까? 라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 다른 문턱을 만났을 것이고, 그것을 건너기 위해서 경쟁이란 이름으로 나와 다른 이들을 떨어뜨려야 하는 달리기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게을러지거나 나만을 생각하는 행복을 그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자라기로 했습니다. 겨울을 오래 갖고, 봄도 오래 갖을 것이기에 내 키는 자라지 않을 것 입니다.

 

나는 내가 되려고 합니다.

 

 폐를 끼치고 산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것은 늘 약자에게서 먼저 오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이나,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기대어 있지 않고는 생활이 어려우며, 그것을 통해 내가 살아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런점에서 아픈사람들은 아픈 것으로 자신의 생활과 생이 위협을 받는 위태로운 상황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하다는 것을 알아 갑니다. 서로 지여지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만이 폐일까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기에 남에게 기대어 있는 것 같지 않은 재벌이나 권력자들처럼 남에게 크게 폐를 끼치는 자들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거대한 부는 매일매일 수많은 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리며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해주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권력은 수많은 사람들이 내는 세금에 기대어 있고 그 세금으로 움직이는 관료들이나 '졸개'들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알기에 그런 이들 가운데 자기가 먹을 식사를 '혼자서'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고, 자기가 입은 옷을 빨고 다리는 것조차 자기 손으로 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일상의 삶이나 매일의 조그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남들에게 폐를 끼치며 살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밥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진다면, 빨래를 해주던 사람이 없어진다면, 남들은 혼자서 하는 일상의 생존조차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장애자인 것이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누구든 남에게 신세를 지며 산다는 것, 폐를 끼치며 산다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다. 그래도 돈이 없는 자들은 좋든 싫든 남에게 폐를 끼치고 산다는 것을 자각하며 산다. 폐를 지워줄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폐는, 우리의 기대어 있음은 이처럼 지불수단의 부재, 지불능력의 결여를 통해 드러난다. 반대로 돈이 많은 자들은 자신이 항상 타인들에 기대어 산다는 것, 타인들에게 폐를 끼치며 산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지불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자신이 끼치는 모든 종류의 폐를 미리 지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줘야할 돈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에조차, 자신들이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책을 그대로 읽습니다. 이 말을 옮기는 것으로 강연 후기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저로서는 이것을 대체할 말이나 제 안으로 풀어서 쓸말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존재자는 항상-이미 다른 수많은 존재자들에 기대어, 그것들에 '폐를 끼치며'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장애자다. 무언가에 기대어 존재하는 것이 모든 존재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모든 존재자는 운명적으로 장애자들이다. 이 경우 장애는 존재 그 자체와 결부된 것이란 점에서 존재론적 장애다. 이런 점에서 모든 존재자는 '동등하다'. 즉 존재론적 장애자라는 저메서 동등하게 '하나'로 묶일 수 있다. 장애자는 이런 기대어 있음을 통해 모든 존재자들을 하나로 묶게 해주는 하나의 '범주'다. 장애자란 이렇게 하나로 묶인 모든 존재자를 지칭한다. 장애자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존재론적 일반성'에 도달한다.





작성 : 2013/05/2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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