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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제목과 다르게 책은 학살자가 죽은 어느 날, '내'가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학살자가 사과없이 죽어버렸다고 분노한다. 책을 열자마자 분노가 시작해서 독자는 좀 당황스러울 수도있다. '나'는 그만큼 자신이 겪지 않은일도 나의 것처럼 생각하고 아파하는 사람이다. 혹은, 어떤 역사와 1:1로 서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당신의 삶과 거대한 역사적 사실이 그다지 상관 있어 보이지 않는데요.
나쁘게 말해 '나'는 거대한 역사적 시간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 역사와 무관할 수 있을까. 무관해 보인다면, 그렇게 보이도록 누군가 애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의사는 '나'에게 '사과'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다시 말하면 받아야 할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의사는 그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유한다.
'나'는 일기 쓰기 모임에 나가 '시옷'이라는 가명으로 일기를 쓰게 되고, 그 일기의 이야기와 과정을 모은 것이 바로 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이다. '나'의 삶에서 중요했던 사람들이 사과하지 않아 상처가 된 일이 실려 있다. 그의 어머니, 아버지, 어떤 아저씨, 할머니... 학교 선생님, 친구들... 모두 그에게 약간의 잘못을 했고, 그게 그렇게 상처가 될 줄 몰랐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 그냥 넘어갔고... 계절이 짧고 시간이 금방 지나가 네가 금방 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작은 상처들이 모여 한 사람을 이뤘다면? 여자, 아이에게 남은 '기억은 영영'을 풀어간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교차하며 현재 '나'는 50대 여자다. 어렸을 적 대학시절 운동에 참여했고, 남편이 있으며 현재 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20대에 접어든 딸이 하나 있다.
나는 가계부에 '해준 운동화 138,000원 홈플러스 월드컵점, 석구와 <윤희에게>감상 20,000원 아트하우스모모'같은 글자를 만년필로 썼다. 위클리 플래너에 '학원 홍보자료 인쇄 감리 2월 1일, 석구 모 2주기 기일 2월 19일' 같은 글자를 쓰기도 했다. 만년필을 쥐고 사각사각 감촉을 느낄 때면 석구의 손을 잡은 기분이 들었다. 석구의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63p
만년필을 도통 쓸 일이 없는 '나'는 만년필로 가계부를 쓴다. 그러나 사실 만년필이 더 어울리는 것은 오히려 석구일 것이다. 그는 시를 쓰고 싶어했다. 다소 어울리지 않는 선물을 받은 '나'는 만연필을 쥐며 석구의 손을 느끼는데, 사실 만년필을 쥐고 쓰는데서 어떻게 손을 잡은 느낌이 드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몇 가지 나이브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는 손과 만년필을 쥐는 방법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를 만년필과 문자에게서 모두 너무 낯선 사람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50대의 여성이 만년필로 가계부를 쓴다는 묘사는 다분히 관습적인, 고착된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만년필이 고장이 나고, 고치려 애쓰는 것이 이 소설의 또 중요한 줄기가 된다.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음,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음의 끈질긴 가능성이 만년필을 고치려고 애쓰는 일과 연관되기도 하고, 혹은 고장나 복구할 수 없는 석구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의 삶은 거두절미하고 현재 당원을 스토킹하고 성추행해서 제명되었다. '나'는 석구에게 할 말 없냐고 묻는다. 석구가 하는 말은 이렇다. "널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해. 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아." 정말이지 모든 문장이 잘못되었다.
석구는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 적인 말 중에 로고스만을 이야기해 사실을 축소시키고 '나'에게 상처를 준다. 이 대목은논리적으로(만) 따져 묻는 사람이 사실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소통이 가장 안되는 사람은 논리적인 대목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감정과 인격이 결여된 이와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에게는 자신의 마음이 정당하다는 마음 밖에 없다. 마음이 정당하니 다른 이에게 사과할 것도 없다는 끔찍한 결론. 나와 삶을 함께 한 사람이 보여준 실망스러움, 부끄러움이 '나'의 인생을 파괴하는데, 고작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이름으로 축소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는 어처구니 없는 대화에서 말을 잃는다. 어떻게 사과를 요구할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정당한 사과로 나를 치유할 것인가. 혹은 사과없는 상처를 어떻게 아물어 어떻게 앞으로 나갈 것인가?가 바로 이 소설이 안고자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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