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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실은 움직임이다. 눈동자는 물론이고 몸 전체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항공사 승무원처럼 신뢰와 안정감이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들은 눈동자나 고개가 아니라 가능한 한 몸 전체로 상대를 바라보라는 훈련을 받는다. 87p
병신, 즉 병든 신체를 모방하거나 상징으로 활용하는 춤은 한국 민속춤에서 쉬이 발견된다. '병신의 몸'은 밀양백중놀이, 송파산대놀이, 양주별산대놀이 등 각 지역에서 탈춤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 놀이와 굿 속에서 계승도었다. 각지에서 재현, 표현되는 '병든 몸'들은 현대적 의미에서 거이 모든 장애 유형을 망라할 만큼 다양하다. 뇌병변장애인이나 소위 '언청이;로 불린 안면 손상, 발달장애, 팔이나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 '(안팎)곱사'라고 불리던 척추장애, 시각장애와 청각장애, 뇌전증('간질')이 있는 몸의 특성을 모사하는 춤이 전승된다. 한때 '문둥이'(한센인)로 지칭된 몸들 역시 민속춤의 주된 표현 대상이었다. (...)
병신춤에서 장애가 있는 몸들은 다양한 맥락과 역할로 재현되지만 주로 '병신의 몸'을 통해 양반을 희롱하며 권위를 비웃고, 지배적 권력질서를 해체하는 기능을 맡는다고 한다. 110p
한 연구자는 병신춤이 "신체장애자를 흉내내어 모멸하기 위해 추는 춤이 아니"며, 춤출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춤출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춤이기에 육체 해방의 뜻"이 이 춤에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또한 불구자가 불구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자기폭로의 춤"*이며(...) 112p
*김효성, <공옥진 병신춤의 장애-모방 연구: 일인창무극 <심청전>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협동과정 문학석사논문, 2019, 69쪽
그러니까 발레처럼 비교적 엄격한 체계와 규칙, 질서가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이를 도저히 충족할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몸들이 있기 마련이다. 발레가 특별히 차별적이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접근할 수 없는 체계를 사랑하게 된 사람은 퍽 아쉬운 운명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특정한 규칙과 체계에 대해 '닫힌'사람이라도, 그 체계와 규칙을 얼마간 창의적으로 변형함으로써 그 체계 안에서만 접근이 가능해 보이던 가치나 의미를 자신에게 열린 세계를 통해 만나는 경우도 있다. 160p
김지수는 단원들이 실패해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자기 신뢰'를 갖기를 바랐다. 201p
(...)말하자면 춤을 복잡한 '종이접기'로 전제한다. 유튜브는 커녕 인터넷망도 깔리지 않았던 1990년대 중반 고립된 마을에 살던 때에도 나는 종이학을 접을 수 있었다. 종이학을 만들고 싶다면 "1. 종이를 대각선 반으로 접는다.2. 반으로 접은 쪽을 다시 반으로 접는다. 3. 대각선으로 접은 선을 펴서 직각삼각형 모양을 만든다....."는 식으로, 일련의 독립된 행동 절차를 따르면 된다. 내 종이학은 서울 대치동에서 공부하던 10대 소년의 종이학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마다 손재주가 다르고 종이의 크기나 질감도 다르지만 각각의 절차를 수행하기만 하면 그 종이학의 핵심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춤도 종이접기처럼 독립된 움직임의 패턴으로 쪼개어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원본'의 동일성을 잃지 않고서 먼 시공간까지 춤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2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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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3부로 구성된다.
1부 중 <병든 몸들의 춤>이 무척 새로웠다. 거의 이야기 되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꼭 필요한 이야기 같았다.
2부중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 극단 애인의 장애인의 연극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다. 바로 곁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3부는 좀 의아한데, <무용수가 되다>라는 큰 장제목에 어울리는 내용이지만 발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고, 니진스키 등의 이야기가 이렇게 크게 할애 되어야 했을지 의아하다. 하지만 저자 본인이 무용수 되기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놀랍고 보편적이지 않았던 무용수의 이야기를 살펴봤어야 했을 것 같기는 하다.
저자는 도서 초입 두 가지 중요한 도서와 작가를 다룬다. 도서는 <코레오그라피란 무엇인가>와 일라이 클레어이다. 일라이 클레어의 저작을 살폈음에도 저자의 글에서는 병든 몸에 대한 긍정성, 가능성, 미래와 낙관이 가득하다. 그가 현재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는 현실에 기반했기에 넉넉히 가능하고, 또 옳은 이야기처럼 보인다. 역시 젠더가 출동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뤄낸, 손에 잡아낸 현재가 굉장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발레가 차별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대목 등,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지점들이 있기는 하다. 그건 애써 차별이 아니라고 눈감는 것은 아닐까?
참고할 만한 기사가 있어서 가져왔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앞에서, 표현의 매체로 ‘몸’을 사용하는 무용가들이 느끼는 위협감은 생각보다 크다. 정교한 로봇은 신체적 움직임, 인공지능은 지적으로 동작을 만들고 배열하는 무용가의 능력에 대해 이른바 ‘현타’를 일으킨다.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화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사진기가 나오면서 모네가 ‘빛’을 이용한 사진기의 방식을 받아들였듯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그 힙한 무생물이 못하는 것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이다."
완벽한-인간 이상의 몸짓을 완성하려고 했던 무용가-발레에 빗대어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정교한 로봇의 출현에 오늘날 발레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고 있을까? 몸의 통제되지 않음과 통제되는 몸 사이로 나오는 '춤'이 새롭게 이야기 될 요소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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