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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글

크리스마스 리스

_봄밤 2018. 10. 14. 17:11


2년 정도 한 동네에 살게 되면  맛집이라고 알려진 가게들의 사정을 알게 된다. 반 이상 남겼던 누룽지탕이 그랬고, 해물의 수를 한 손으로 꼽아낼 수 있는 해물파전집이 그랬다. 백종원의 발자취가 남겨진 집은 끼니 때가 아니라도 사람들을 줄 서게 했고, 그 중에 나도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다시는 줄 설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불모지에서 한줄기 희망은, 아무도 맛있다고 얘기하지 않는 평범한 집을 들어갔다가 맛집을 발견하게 되는 데 있다. 

그중 한 집은 카페다. 커피를 먹지 않아 이곳의 커피에 대해서 변호할 수 없지만 동생의 말에 따르면 '커피는 참 별로인 곳이지만', 이곳의 빙수만큼은 여느 집과 대결해도 지지 않으리라. 올해 마지막일 빙수를 먹었다. 빙수의 끄트머리에 한 숟가락 정도만 장식하는 팥이 아니라, 이 흰 우유 빙수의 산 아래 팥이 층층이 끝없이 숨겨져 있는 팥빙수였다. 아몬드 슬라이스가 함께 부서져 내리고 무엇보다 삼분의 일쯤 먹었을 때 녹아내림으로 빙수의 끝을 예견하게 되는 것과는 다른,  끝까지 빙수의 형체를 간직한다는 점에 감동을 주었다. 계절 메뉴라는 말로 일찌감치 끝났을 빙수의 시즌을 10월 중순으로도 연장하는 동네 카페의 유연함이 맛을 더 인상적으로 보여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다 먹고 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크리스마스 리스가 짤랑였다. 그건 아마 12월의 준비라기보다 작년의 연장일 가능성이 높았으나, 그래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어. 하고 뒤를 돌아보는 일은 즐거웠다. 

아침마다 코피가 나는데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고 건조함 때문이다. 가습기를 틀기 시작했고, 숨을 쉴 만했지만 토퍼 한쪽이 축축해졌다. 적당한 거리를 맞추려다가 잠이 들었고, 가습기는 중간에 물이 다해서 꺼졌다. 아마 자는 내내 나올 수 있도록 세기를 조정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밤에 에이미 와인하우스에 대한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14살 때인가, 친구들과 막대사탕을 빨며 노는 파티 영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곧 그녀가 심심풀이로 불렀을 생일축하 노래-재즈-를 말문이 막힌 채 듣게 된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애의 목소리는 이미 마흔이 넘은 완숙함에 가까웠다. 그녀는 27살에 죽었다. 평범한 우리들의 나이로 환산하자면 예순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턱없이 짧은 그녀의 생이 안타깝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그녀의 몇 배의 긴 인생을 살게 되면 대체 무엇이 더 아쉽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남았다. 

앉고 싶은 식탁을 연출해 내고 맛있게 다 먹고야 마는 영상 몇 개. 이런걸 하고 싶게 만들고, 따라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게끔 하는 영상들을 끄고, 아까의 조명과 음악도 없이 내가 서야할 주방에 가서 내가 먹을 것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아는 것들을 넣어서 무엇을 먹을지 알게 되는. 그건 오늘 저녁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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