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도로의 빗물받이처럼 생긴 철판이 하늘 아래 이어져 있다. 격자와 육각의 구멍으로 보이는 수 만개의 하늘이 어지러웠고, 그것으로 버티는 다리는 한 발 뗄 데마다 조여진 나사 하나까지 크게 확대해 보도록 도왔다. 걷는 동안 나사의 머리가 보이지 않는걸 보니 다리의 바닥에서 조인 모양인데, 한 순간은 안심이었다가 다음에는 불안이다. 나사의 상태를 알지 못한채 걸어야 한다니.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나사의 머리가 보인다면 아무나 만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나사 머리가 앞에 있건 뒤에 있건 그건 내가 안다고 해도 혹은 모른다고 해도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리는 하늘을 가로질러 있기로 했고, 그 다리의 안전은 이미 모두 끝난 상태여야 했다.
소금산 출렁다리를 건너며 생각했다. 출렁다리를 있게 한 몇 가지 과학의 법칙들을. 떠올린다고 해서 기억나지도 않을 것들이지만 그런거라도 방패 삼아야 한다는 듯- 그러나 구체적인 기호를 생각하기도 전에 다리는 출렁거리며 자꾸 어긋나고 있었다. '과학'이니 '기술'이라는 말들과. 그런 단어는 '출렁다리' 뒤에 말해지면 우스워졌다. 이 다름에 올 말들은 차라리 하늘이나, 기도와 같은 말이어야 할 것 같았다.
가을의 초엽, 이 다리를 걸으려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데는 평안, 행복, 우정 같은 것들이 있었고, 그 말에 약속이라도 하듯 연인에서 가족까지, 핵가족에서 대가족, 십 대에서 육십대까지, 한 장소에 모이기 어려운 함께가 다리 위를 걸었다. 원주를 오게 한 카피에 출렁다리를 건너세요! 라는 말은 있었겠지만, 그 다리를 건너기 위해 600개의 나무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말은 생략되었을 것이다. 100미터 위에 있다니 그 정도의 등산을 염두했어야 했지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그런 계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보통 힘든 길이 아니어서, 대략 삼십분에 가까운 계단을 타야했는데, 계단 하나를 올라갈 때매다 건강 수명이 몇 초 증가된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얻어진 건강 수명은 이십분 남짓이었고, 그렇다면 과연 나의 수명은 늘어난 것인가, 그런 계산을 해가며 걸었다.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달리기 선수가 생각이 났고, 그 달리기 선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이 이야기를 들었던 중학교 과학실 같은 게 생각났고, 그 과학실에 있던 사람의 대부분은 결혼을 하고 결혼한 이들중 반 쯤은 아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그리고 나는 소금산의 출렁다리를 건너고 있다. 걷다보니 아주 곁이었던 사람들과 이제는 이 출렁다리 아래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만 개의 구멍으로 아래가 선명하게 다 보이는 철판의 허술함을 비난하다가, 비에 무거워질 다리를 생각하니 이 바닥은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세상의 이름도 알지 못하는 다리들의 물빠짐을 한참 걱정하며 또 몇 발자국을 걷고. 비가 빠져 흐르는 출렁다리를 생각하며 그 모습을 상상하다가 슬퍼지고 또 한 발자국. 중간쯤 가서는 이곳에 출렁다리를 세우자고 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소금산에 다리를 만듭시다' 처음에는 마음 속의 한 문장, 태어나지 않았을 목소리로의 출렁다리를. 소금산에 출렁다리 짓기. 종이에 적힌 한 줄을 또 생각했다. 그런 목소리가 수 천개로 변주되어 정말로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 무모한 한 줄을 진짜로 걷는사람이 생겨, 이 다리가 완성되었다.
다리 아래로 나무들의 머리가 보인다. 두려움에 덧칠되는 수 많은 마음도 보였다. 출렁다리라는 허술하고 옛날 같은 말은 어디서 방방을 타자는 것처럼 누구나 올 수 있다는 인상을 잘도 심어 아빠 아기띠에 잠들어 건너는 아이도 봤다. 건너가서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부탁했는데 아주머니들은 모자를 썼다가 벗었다가, 하트를 하라고 해서 나는 정말로 놀랬다가, 정말로 할 뻔했다가 엉거주춤하며 사진촬영이 끝났다. 열정적으로 열댓장을 찍어주셨다. 사진을 보면 나의 난처함을 배경으로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깔깔깔 적혀있다.
출렁다리 입장표는 놀이공원이의 손목 띠 같은 것인데, 이게 또 재미있다. 발권소가 곳곳에 있는데 무인 발권소가 종종 있다는 게 특징이다. 표는 3천원인데, 원주에서 쓸 수 있는 2천원짜리 상품권이 나온다. 손목띠에는 바코드가 있어 이걸 입구에서 찍으면 숫자와 입장이 카운트 된다. 내 돈 낸 건 잊고 돈을 받은 것 같아 즐거워서 뭘 살지 고민하게 된다. 나가는 길에 이곳의 특산물, 빵, 옥수수, 막걸리 등을 파는 가게가 많다. 이 상품권은 심지어 이곳에 있는 편의점에서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천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 돈을 더 쓰게 된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갈아주는 복숭아(치악산 복숭아!) 생과일 쥬스를 먹어보기로 했다. 장사에 서툰 남매는 얼은 복숭아와 성능이 시원찮은 믹서기와 씨름했다.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결국 먹을 수 있었고, 생각보다 맛있었다.
구월은 무엇으로 가득차게. 첫 주는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 숙소는 원주 혁신도시 근처였다. 넓고 깨끗한 부지, 다정하고 특색있는 카페들, 도시 안을 감고 도는 강.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별이 보였고, 그런 밤은 내가 떠나야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하나라는 사실, 내가 하나 뿐이라는 말을 제대로 깨닫는 일은 여행으로 선명하다. 물론 고됐지. 600개 좀 못되는 계단, 오가는 버스 안, 길을 찾는 시간들. 건강 수명을 챙기면서 그보다 더 빠르게 닳는 시간을 향해가고 있다. 웃음이 나오는데 건조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 얼굴이 잘 웃지 못하게 되지 뭐야.
그런데, 그곳도 가을인가.
'이후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빠이의 삼각형 (0) | 2018.10.11 |
---|---|
누구나 어떤 화장실 앞에서 3바트를 외치고 있다는 생각 (0) | 2018.10.01 |
검은 피부, 하얀 가면-프란츠 파농 (0) | 2018.08.15 |
점심이 지나서 (0) | 2018.08.10 |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중에서 (0) | 2018.08.07 |
- Total
- Today
- Yesterday
- 지킬앤하이드
- 차가운 사탕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김소연
- 상견니
- 이영주
- 책리뷰
- 대만
- 한강
- 1월의 산책
- 서해문집
- 진은영
- 희지의 세계
- 이병률
- 후마니타스
- 정읍
- 뮤지컬
- 이준규
- 열린책들
- 배구
- 피터 판과 친구들
- 문태준
-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 궁리
- 이장욱
- 네모
- 일상
- 민구
- 이문재
- 현대문학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