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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나는 마르티니크 여자』의 다음 구절을 읽을 때 심란해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백인과. 한 가지 문제는 유색인 여성은 백인 남성의 눈으로는 결코 온전히 존중받을 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나를 사랑하더라도 그렇다. 나는 그걸 알았다." 이 대목은 어떤 의미에서는 거대한 기만적 결론이 되어 우리를 상념에 잠기게 한다. ...어떤 계층에서 이 책에 대해 열광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분석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완곡하게 말할 것이 없다: 『나는 마르티니크 여자』는 불건전한 처신을 뇌까리는 싸구려 작품이다.
정말이지 선하고 자애로운 신이 흑인일 수는 없다. 신은 뺨이 발그레한 백인이다. 흑에서 백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동선이다. 부자니까 백인이고 잘생겼으니 백인이고 똑똑하니 백인이다. 52p
사랑받을 만한 대상으로서 자기가치에 대한 그런 부정은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그런 가치 부정은 그 사람 개인을 한편으로는 깊은 내면적 불안 상태에 있도록 하고, 그로 인해 타인과의 모든 관계를 금하거나 뒤틀리게 한다. 그는 연민이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의심한다. 이런 감정적인 자기가치 부정은 어린 시절에 사랑과 이해의 결핍으로 고통받았던 존재들에게서만 관찰된다. 76p
20세기에 자기 나라에 있는 흑인은 그의 열등성이 어떤 순간 타자에 의해 생겨났는지를 전혀 모른다. .....물론 우리는 친구들과, 혹은 아주 드물게는 아메리카 흑인들과 흑인 문제를 토론한 일이 있다. 우리는 다함께 항의하고 세상의 인간 평등을 확인했었다. 앙티유에서는 백인 정착민, 물라토, 그리고 검둥이 집단 사이의 사소한 충돌도 벌어졌지만,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비극적이지 않았다. 108p
그렇지만 나는 내 생명을 다해 그런 절단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만큼 드넓은 영혼, 진정 가장 깊은 강만큼 깊은 영혼을 자각한다. 내 가슴은 무한히 확장되는 능력이 있다. 나는 주인인데 그들은 내게 불구자처럼 부끄러워하라고 충고한다. .....어제,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하늘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나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내장을 빼낸 침묵이, 날개가 마비된 채 내게로 돌아왔다. 책임질 수 없는 나는 무와 무한 사이에 걸터앉아 울기 시작했다. 140p
예를 들어 어느 반유대주의자라도 유대인을 거세한다는 생각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을 죽이든가 살균처리 해버린다. 그러나 검둥이는 거세당한다. 정력의 상징인 남근은 없어진다. 다시 말해 부정된다. 이 두가지 태도 사이에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유대인은 자신의 종교적 인격, 역사, 종족, 조상 및 후손과 맺는 관계에서 타격을 입는다; 자신들이 살균처리하는 유대인에게서 그들은 그 근원을 잘라버린다; 유대인 한 사람이 박해받을 때마다, 그 한사람을 통해 그들이 박해하는 것은 종족 전체다. 그렇지만 검둥이의 경우 그들이 타격을 가하는 것은 그 신체성이다. 그들이 검둥이게게 린치를 가하는 것은 그 구체적인 개별 인격에 대해서다. 검둥이는 현재의 그 존재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157p
모든 지적 획득은 성적 잠재력의 상실을 요구한다. 문명화된 백인은 성적 방종이 넘쳐나던 시대, 무절제한 축제의 장, 처벌받지 않고 행해지는 강간, 억압받지 않는 근친상간에 대한 비이성적 노스탤지어를 간직하고 있다. 이 환상은, 어떤 점에서는, 프로이트의 생의 본능에 부응한다. 백인은 자기의 의도를 검둥이에게 투사하면서, 마치 검둥이가 실제로 '그런 듯이'처신한다. 대상이 유대인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백인들은 부를 소유하거나 윗자리를 차지하는 유대인을 불신할 뿐이다. 저 검둥이는 생식기에 매어 있다; 아니면 적어도 저들이 검둥이를 그렇게 매어놓았다.
백인과 흑인 사이에 공공연한 투쟁은 없다.
어느 날 주인 백인은 투쟁 없이 검둥이 노예를 인정했다.
그러나 예전의 노예는 자기를 인정하게끔 만들기를 원한다.
헤겔 변증법의 밑바탕에는 절대적 상호성이 있고, 이는 분명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서문에서 인간은 하나의 긍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이 말을 누누이 되풀이할 것이다.
삶에 대한 긍정, 사랑에 대한 긍정, 관대함에 대한 긍정. 그러나 인간은 또한 하나의 부정이다. 인간 멸시에 대한 부정, 인간의 저열함에 대한 부정, 인간 착취에 대한 부정. 인간 안에 있는 더욱 인간적인 것, 곧 자유의 살해에 대한 부정. 213p
지적 소외는 부르주아 사회의 창조물이라는 점이다. 나는 모든 진화, 모든 전진, 모든 진보, 모든 발견을 가로막은 채 결정론적으로 경색된 모든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라고 부른다. 나는 살기 좋지 않고, 공기는 썩었고, 사상과 사람들은 부채한 막힌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라고 부른다. 또 이 죽음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혁명가라고 믿는다.
흑인은 백인과 같기를 원한다. 흑인에게는 단 하나의 운명이 있다. 그것은 흰색이다. 이 문제라면 이미 오래전에 흑인은 백인의 명백한 우월성을 인정했다. 따라서 흑인의 모든 노력은 하얀 존재함을 실현하든 것이다. 220p
유색인의 불행은 노예화되었다는 데 있다.
백인의 불행과 비인간성은 일정 부분 인간을 살해했다는 데 있다.
유색인인 나는 단 한가지를 원할 뿐이다.
결코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지 않기를. 인간이 인간을, 말하자면 자아가 타자를 노예화하는 일을 그만두기를. 인간이 어디에 있든, 내가 그 인간을 찾고 원하도록 허락되기를. 223p
검은색과 흰색을 벗어나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었던 그는 춤처럼 유연하고 글을 쓴다. 말하자면 학문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떤 목차나 계보를 짜기보다 그가 그리는 언어의 자락을 따라다녀야 한다. 어느 부분은 분명히 시이다. 굉장히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던 사람 같았다. 그는 서른 여섯의 나이로 죽는다.
.....어제,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하늘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나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내장을 빼낸 침묵이, 날개가 마비된 채 내게로 돌아왔다. 책임질 수 없는 나는 무와 무한 사이에 걸터앉아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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