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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도 이렇게는 못쓸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접어두었다. 때는 1896년을 전후한 인천의 감옥이다. 


아홉 개 감방 죄수들이 <태서신사>에서 가장 흥미로워한 대목은 성난 군중이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대목이었다. 언문을 겨우 익힌 죄수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짚어 가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정을 실어 읽었다. 


(...) 먼 나라에서 벌어진 멋진 이야기일 뿐이야. 395p


김창수가 가르친 죄수들이 언문을 대충 떼고 함께 번역해 들어온 서양의 책을 읽는 부분이다. 이 대목에서 효과적인 서술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마 대사를 넣지 않고 이 대목을 읽은 이들의 얼굴 표정이나 당시의 분위기를 에둘러 말하는 게 안전을 넘어 윤리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확신하고 싶은 것은, 19세기의 죄수들이 당시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하는 말이 지금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감정으로 표현되었을리 없다는 것다는 것이다. 


팻 가보리가 원주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법정 심리에서 "나는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한다"라는 의미의 법정 선서를 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가 했던 말을 어떻게 표기할지 생각해보라. (...)당시 가보리가 제시한 공식 표현을 언어학자들이 쓰는 방식으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직역: 나는 일을 오직 오른쪽으로 만들겠다, 나는 (아무것도) 왼쪽으로 만들지 않겠다.

의역: 나는 일을 바르게만 하겠다, 나는 아무것도 비틀거나 왜곡하지 않겠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32


물론 이렇게 극적으로 다른 언어를 썼을리는 없겠지만, 당시의 인간을 구성함에 있어 정신과 언어는 지금과 매우 달랐을 것이기에 '먼 나라에서 벌어진 멋진 이야기일 뿐이야'식의 대사는 작가가 그 당시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만을 가져와 어떻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가, 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인물에 대한 예의가 없이 자신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 적재 적소로 소모하는 지 잘 보았다. 한 권이 끝나도록 넘치게 보이는 죄수들의 내외면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인간들은 납작하기만 한다. 그 이유는 이렇게 '무감각'한 대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글들은 전형으로서의 인간, 민초, 천한 사람으로 대충 그려지는 상상 속의 군상, 그 테두리를 넘지 못한다. 그들은 실존할 수가 없다. 인간을 학습한 인공지능이라도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쓴 것은, 작가에게 '먼 나라에서 벌어진 멋진 이야기'를 하나쯤 이곳에서도 심어야 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대장 김창수>는 현재 개봉 첫 주인데, 안타깝게도 별 하나와 별 열 개 사이를 급하게 오가고 있다. 김탁환 작가는 주로 방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부여해 새로운 이야기를 써냈다. 이번엔 김구의 20살을 가져왔다. 책은 빠르게 읽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청년 김구의 삶이 이러했으니 이 시대의 청춘에게 역경을 돌파하라는 희망의 전언이라도 주자는 것일까? 


대체로 왕은 국가의 우두머리로, 국민은 신체로 표현된다. 법은 신체의 신경에, 군대는 팔에, 상업은 다리나 위에 비유된다. (...) 인공적인 국가(리바이어던)와 인간 신체 간에 형태론적 일치가 있음에도 신체는 좀처럼 성(sex)의 속성으로 읽히지 않는다. <공간 침입자>, 36p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 '우두머리'인 김창수와, 그의 국민인 '신체'들 감옥 동기들과, 김창수를 마비시키려는 '법'의 망과, 김창수와 동지들을 실제로 제압하는 군대(간수)들. <대장 김창수>는 조선이 망하고 새로 태동하려는 새로운 국가 신체 형성기를 그렸다. 이 국가의 성은 당연히 남자이고, 때문에 왜 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여자는 다뤄지지 않는다. 책에서 여자는 조경신이라는 의료 과장이 유일한데, 그는 김창수의 조력자로, 죄수들을 어루만지는 모습으로 나온다. 김구의 어머니의 대사가 있긴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때문에, '천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카피에는 '사람'의 함의에 '남자'를 초과하지 못하는 한계를 선명하게 긋고 있다. 그리고 한계는 현실을 은유한다.  


이 소설이 '지금'에 나온 것은 아마도 작가가 현실의 정치,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 이후 만들어가야 할 국가 신체에 대한 기대가 김구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광화문 촛불 시위로 박근혜 정부를 끌어내리고 새롭게 구성된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그해 겨울, 광장에는 수만의 사람이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나왔지만, 촛불 시민을 대표하는 '신체'가 있다고 믿어진다. 


<대장 김창수>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간인 간수와 짐승인 죄인의 사이에 선 김창수가 모두의 멸시와 괴롭힘 끝에 죄인들부터 마음의 빗장을 열어 그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글로써 탄원하고, 다음에는 글을 가르치고 마침내 탈옥도 함께 하는 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청년 김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갈등과 전개와 감동이 세계적으로 익숙한 방식으로 쌓여있으며 웬만한 장면은 다른 이야기에서 한 번쯤 다뤄진 구도를 '왜 또 썼는가'가 이다. 


내 문장이 '더' 올바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는 확신을 두려워했으면 좋겠다. 작가란 정의나 윤리, 법처럼 당연한 빗금안에 사람을 세워두고 더 도드라지게 명암을 갖다 대는 사람이 아니라, 법이나 세상의 윤리, 그 무엇으로도 판단하지 못하고, 나약하고, 늘 흔들리는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을 제시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해야한다. 여기에 딱 맞는 이야기가 있다. 


<땐뽀걸즈>다. 떈뽀란 댄스 스포츠의 줄임말로 거제도 사투리인 것 같다. 거제도, 이제는 침몰한 조선소의 수도에서 사는 여고생들의 이야기다. 매일 나무젓가락과 면봉을 지져서 눈썹을 올리고, 비슷비슷한 흰 색 분과 오렌지 립으로 그려지는 18살 여자아이들 각각의 삶을 조금씩 본다. 여고생의 댄스 스포츠 이야기라니. 그런 것들이 (어른인 나에게)뭘 주겠냐고 물을 수 있다.


거제도 조선소의 경제가 붕괴되었다는 이야기는 현업에 종사한 이들의 숫자의 감소로서만 전해졌다. 그곳에 사는 18살의 여고생, 내년에는 취업에 나가야 한다. 조선소에서 이십 몇년을 일했던 아버지들이 회사를 그만두는데, 그 '조선소'에 취업을 준비하는 여상을 다닌다. 어떤 미래가 그려지는가. 지루한 수업을 듣고, 그 취업이 아니라면 별 다를 미래가 없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방과 후 댄스 스포츠를 한다. 박자가 맞고, 스텝이 몸에 익숙해질 때 내가 비로소 '움직이는' 느낌을 위해서. 다시 말해 '살아있다'는 느낌을 알기 위해서 말이다. 고깃집 알바하고 방세 내면서 학교 나가는 애들. 방과 후 동생들과 조카 여섯 명을 돌보는 아이, 아버지 거제도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 가는데 아버지와의 저녁 약속도 취소하고 전국대회 위해서 밤늦게까지 땐뽀 연습하는 심정 같은 것. 


그녀들은 자신들의 삶을 대단치 않게 말하지만, 무엇이 기쁘고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걸 땐뽀를 하는 모습으로 알려준다. 국가를 이루려는 우두머리 같은 이야기 말고, 그 우두머리에 감화되어 수족처럼 달려들 천하고 평범한 사람 말고. 


여고생이 어떻게 웃는지 아는가? 심지어 그 때를 살아왔을 이도 다 잊었을 웃음을 여기서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이 지면에는 담을 수도 없이, 무릎과 배와 어깨가,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생기가 잘 도는 볼과 입술이 설명할 수 없는 템포로 웃는다. 그야말로 살아 있음의 현현으로서 아이들이 삶을 <땐뽀걸즈>는 보여준다. 


좋은 자리를 점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회에서 '정의'로 구분되는 편에서 서는 부류들. 그 이미지를 파는 사람들. 그 스탠스가 곧 그 사람이 아니며, 그 스탠스에서 나온 결과물이 곧바로 정의 라는 식으로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자리는 아무래도 상관없이, 어떤 이야기인가. 그 결을 보여주는 글이 중요하다. 이 책은 아무래도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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