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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라노>의 줄거리가 있습니다.
<시라노>평점은 별 두개입니다.
별 하나에 홍광호, 별 하나는 예매할 때의 설렘
9월 10일 일요일 두 시 공연을 봤습니다.
커튼콜이 시작되고
앙상블부터 조연까지 층층 겹을 이루고 허리를 굽힌다, 손을 흔든다. 이와 거의 동시에 저 앞자리에서부터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대 바로 앞 배우들이 내는 먼지조차 보일 자리. 이 기립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내가 닿지 못할 순간을 엿본 이들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립이 내가 있는 열까지 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1층 R석이었지만 변두리에 있었다. 기립박수는 파도와 같아서 덮쳐지는 데가 있었고, 순식간에 내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섬처럼 갇힌 것처럼 일어나지 않고는 무대를 볼 수 없었다. 엉거주춤 일어나니 홍광호가 나오고 있다.
여기서 나 역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으나 혼란스러웠다. 이 박수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가?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두시간 사십분동안 진행되는 뮤지컬에서 그는 거의 2시간 내내 노래한다. 그의 연기와 성량과 웅장한 톤의 노래는 더할나위 없었으나, 단지 그뿐이라면 <시라노>라는 이름은 대체 무엇일까.
추리를 시작하자. 이 무대가 의미있을 이는 대체 누구인가. 자리를 떠나 공연장 밖으로 나오며 무대 시작하기 전 오케피의 지휘자가 저 아래서 얼굴만 보이며 인사를 한 순간이 생각났다. 입구에 들어서자 보였던 포스터, 무대 아래의 오케스트라 하나 하나, 그들의 연습, 배우들의 연습, 거울, 장소 섭외, 투자 섭외, 수익분기점, 전략...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무엇이 만들어낸 이 무대는 시작도 하기 전에 감동스러웠다. 기획과 계산에서 무엇보다 나의 감동을 최우선에 놓았으리라고 순진하게 기대하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뮤지컬 시라노는 매력없는 캐릭터, 엉망인 이야기, 지루한 연출로 난국을 겪는 중 홍광호의 노래만 아름답다. 부실해서 자꾸 쓰러지는 뼈대를 오로지 홍광호의 목소리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또 세우다 끝나는데. 배우들의 대사 전달이 시라노와 록산, 그리고 별로 대사가 없는 크리스티앙을 제외하고 잘 안된다. 그러나 이것은 차치하고 가장 큰 문제는 줄거리다. 어째서 이런 대본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최초의 어떤 것이 있었고, 거기에서 다 잘려서 엉망이 된 관계만 남았다고 추정하는 게 이 대본을 최종 컨펌한 이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다. 시라노가 중요하니 그에게 몰아주자 다짐한 것이 잘 이뤄졌다. 1. 록산이 시라노에게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 2. 크리스티앙은 내가 정말 누구인지 고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은 것 3. 시라노는 모든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그는 편지만 쓸 수 있다. 그것도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4. 묶인 시라노, 전봇대처럼 쓰인 크리스티앙 때문에 사건은 록산이 다 만드는데, 이게 어처구니가 없다.
1. 시라노는 매일 적을 만들며 자신의 옳고 굳은 신념에 반하는 것들은 모두 쳐내 버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랑만큼은 이유가 없다. <시라노>의 대전제는 록산에 대한 운명적인 사랑이다. 록산을 왜 사랑하는지,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 그려지지 않으므로 시라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주어진 단서는 '어렸을적부터 오빠 동생'하던 사이라는 것 뿐이다. 록산이 시라노에게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시라노는 내가 사랑하는 록산의 행복을 위해 크리스티앙에게 록산이 너를 좋아하다고 얘기하고, 이들의 사랑을 도와주려고 하고, 그런데 크리스티앙은 아니 록산이 나를? 하면서 영광스럽게 사랑에 임하게 되는 꼴. 크리스티앙이 록산을 좋아하게 되는 원인도 없다. (이게 제일 어이없다) 이 마을에는 여자가 록산뿐인 듯,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록산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사랑할만한 이유를 보여주지 않는다.
2. 시라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는 크리스티앙이다. 크리스티앙은 록산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전달하지 못한다. 당시는 시를 잘 쓰는 것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던 것 같다. (이 점을 보여주는 빵집 주인 라그노가 그나마 볼만한 조연이다)록산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시라노에게 대필을 절실하게 부탁해야 하는 이유가 그에게 있고, 그걸 한 넘버로도 충분히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록산이 그의 편지를 좋아할수록 그건 내가 아닌데, 하는 인지부조화를 겪으며 내가 정말 누구인지 고뇌할 수 있는 절호의 캐릭터인데 고뇌는 시라노만 할 수 있는 듯 크리스티앙에게는 기회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의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그림자의 감정인 시라노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를 백지장만도 못하게 그려놨다. 시라노가 대신 노래를 불러주기 위해서 전봇대 수준으로 그를 세워놓은것. 그리고 전쟁신에서 최고조의 갈등에 이르렀을 때, 그 편지는 내가 쓴게 아니라는 말도 못하게 죽여버린다.
3. 시라노는 록산의 감정과 크리스티앙의 감정을 제일 먼저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종합해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록산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록산을 좋아하지만, 큰 코때문에 생긴 콤플렉스로 록산에게 자신을 고백할 수 없다. 때문에 시라노는 발이 묶여서 사건을 진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건 시라노가 아니라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이 발전에서 비롯된 시라노의 고통스러운 감정의 발전이 이 극의 최대 갈등이다. 사랑에 천착했으면, 사랑의 최대 난관을 좀더 잘 심어놓아야 하는데 시라노가 좀 아프고, 그걸 노래하는 걸로는 갈등의 언덕이 얕다. 여전히 이들의 사랑을 잘 도와주는 꼴이라 끝에 가서는 크리스티앙을 죽여야했다. 어떻게 죽이냐면 전쟁으로 가져온다. 난데없는 전쟁씬으로 시라노는 거인들과 싸우는 용감함과 고백하지 못하는 사랑을 우왕좌왕하며 부른다. 시라노는 가장 가장 진실해야 할 순간에 비겁한데 이 비겁함은 전쟁의 급박함으로 어영부영 덮힌다. 그리고는 도저히 이 시공간을 탈출할 방법이 없자 이야기는 <15년 후>라는 방법을 쓴다. 다음에 말하겠지만 전쟁을 가져오면 뭐하나. 전쟁조차도 록산의 손바닥 안이다.
4. 묶인 시라노는 사건을 만들 수 없다. 전봇대처럼 서있는 크리스티앙의 내면을 연출자는 궁금해하지 않으며 그가 할 수 있는일은 거의 없다(아니 다 빼앗겼다고 봐야한다). 그런데도 이야기는 진행되어야 하니까 록산을 가져온다.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결혼도 자신의 손으로 이뤄내고 크리스티앙이 있는 전장에도 도착한다. 그러나 그녀가 사건을 이끄는 힘이 명민함이나 결단력이 아니라 우연과 어처구니없는 미인계 따위로 대충 쓰인다. 록산은 강인하고, 담대한 여자로 그려야 그녀를 그토록 사랑하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을 막기 위해 2를 갖다대고, 자신의 눈 앞의 안위만 생각하는 듯한 대본은 어처구니없이 극을 이끌고 록산을 미워하게 만든다. 우스운 캐릭터다. 완벽한 민폐 캐릭터다.
5. 조연이 없다. 조연은 그저 빵을 탐하며 자리를 피해주거나 시라노에게 씨알도 안 먹히는 조언을 하거나(적 좀 그만 만들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파발마의 역할 뿐이다. 사건을 진행시킬 수 있는 조연을 하나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극의 진행을 통제할 수 없는 외부요소인 전쟁이나 앞뒤가리지 않는 록산의 임기응변에 기대서 구조가 허술하다. 앙상블을 이렇게 소비하는 것은 거의 죄악이다. 마을의 여자들로 나오는 이들은 대사가 거의 없는데, 그래. 마을의 분위기를 위해서 춤을 추고 사라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춤이 전쟁씬에 나올 때 분노가 치밀었다. 전쟁에 나가기 전, 전쟁에 징병되는 이들을 앞에두고 여자들이 추는 춤은 매혹적이지도 않고 감동도 없고 기분 상하게 하는 질 나쁜 위문공연이었다. 전쟁이 나면 모든 곳이 전시다. 남아있는 이들은 발뻗고 자는가? 그들의 감정은 없이 전장에 나가는 이들을 위해 소비되며 불필요한 시간을 때운다. 연출이 몹시 나빴다.
6. 악역이 조무래기 수준으로 그려진다.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는다. 악역을 대충 그리니까 시라노가 우스워지는거다.. 노래만 주면 다냐
7. 노래하는 홍광호를 빼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의 무대를 보면서 또한 이들이 했을 그간의 연습을 생각하면서, 바보같은 이야기는 사람을 바보처럼 만든다고 생각했다.
8. 그러니 그 박수소리, 그 기립박수는 좀 무서운데가 있었다. 그걸 혼자 받아야 하는 홍광호도 기분이 좋았을까? 이것도 잘 모르겠다.
9. 시라노 원탑의 배우가 끌고가는 게 아니라, 크리스티앙 역도 비중을 크게 늘려 투톱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록산과 투톱으로 가든가. 크리스티앙의 역할을 죽이면서 록산에게 제대로 기회를 주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대충 때우게 두는 바람에 시라노는 사랑과 자신의 신념 어느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끝난다.
정리.
이야기가 엉망이라면, 그 가운데 홍광호만 빛난다면. 왜일까. 왜 이야기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티켓파워 있는 배우 세 명을 갖다놓고, 그 이름만으로 대충 흥행할 것이다, 예측했을 것이다(실제로 그 이름으로 흥행하는데가 있다) 과연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일까? 이야기에 더 공들이지 않는 이유, 그래서 더 좋은 배우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이유. 공연을 기획한 이들은 확실한 자원을 확보하고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쓰는' 데만 치중했다. 탑배우는 빛나보이지만, 이건 결코 그들에게도 좋지 않은 구조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량을 다 보여주기 위해 너무나 많은 노래를 불러야 하고, 혼자 하기 때문에 시너지를 기대할 수 없고, 그것은 배우의 소진을 더 빨리 예상하게 두기 때문이다. 새로운 배우가 등장할 기회도 없고, 앙상한 이야기는 관객에게도 인상을 남기지도 못한다.
뮤지컬은 시적인 것을 아름답게 읊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사느냐 죽느냐를 노래하면 관객이 따라 눈물을 흘릴 수 있고, 내가 인간인가 아닌가를 노래하며 고민할 수 있는 장소다. 현실에서 도저히 말해질 수 없는 가치들을 부르는 마지막 장소. 그런데 그런 고민 없이 지금 있는 명성과 노래를 소비하게 둔다면 무슨 소용일까? 홍광호의 약진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 배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입술에 걸기에는 어렵고, 생각조차 하기 힘든 고민을 대신 부르는 뮤지컬이 해야할 '고민'도 하지 못하게 두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곳에서 기립박수란 무슨 의미일까. 이 뮤지컬을 지속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이 기립박수인 것인데. 이게 제일 이상하다. 왜 나는 기립박수를 할 수밖에 없었나.
나는 일요일의 다섯 시간을 이 뮤지컬을 위해 썼다. 내가 버린다고 버려질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아니었다. 내가 그곳에서 기쁘지 않는다면, 너무나 서글퍼질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그 배우의 출현한 날짜를 예매했다.
나에게는 이정도의 노래만으로도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아니다, 충분하지 않았다...충분했다(고민) 이정도면 괜찮지 뭐...(타협)
라는 시나리오를 써본다. 이런 시나리오를 근거로 그곳에 모였던 모든 이들이 기립박수를 쳤다면, 이러한 정서를 기대한 이들에게서 <시라노>기획이 비롯되었다면. 아니 이번에 기획자의 층위를 나눠서, 연출자의 다른 욕심은 내가 이날 보지 못한 대본에 있었으나 이것을 구현할 자본을 유치할 수 있는 근거를 이 사회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가설. 그러나 이건 아직 희망이 있는 가설이고. 연출자와 투자자의 의기투합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라는 나쁜 설도 가능하다. 진실은 모르지. 지금처럼이라면 뮤지컬 천재의 출현을 기적처럼 기대하거나 아이돌, 유명한 배우가 노래를 잘해서 이곳에 유입되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최후에는 넘버만 남고 이야기는 사라지는 뮤지컬이 될 것이다. 이야기가 왜 이런가, 생각하는 사이 극이 끝났는데 엉거주춤 일어나 의미도 모르는 기립박수를 보내는 멍청이가 있었다. 다음에는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은 객석에서 일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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