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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글

슬픈 일과 마음 아픈 일

_봄밤 2017. 7. 29. 00:23




깨끗하고 후련한 슬픔도 있다. 

그리고 슬픈 일 중에 마음 아픈 일이 있다. 

<바깥은 여름>을 읽으면서 우리를 씻기는 슬픔과 

아프게 하는 슬픔을 생각해 봤다. 








찬성이 보푸라기 인 테니스공을 멀리 던지면 에반은 찬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반드시 공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무언가 제자리에 도로 갖고 오는 건 에반이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찬성은 때로 에반이 자기에게 물어다주는 게 공이 아닌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공인 동시에 공이 아닌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걸 알았다. 


찬성은 '구경이나 해볼 마음'으로 휴게소 전자용품 매장에 들렀다 액세서리 용품 진열대 앞에 한참 머물렀다. 그러곤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한 보호필름을 만지며 자기도 모르게 "사흘....." 하고 중얼댔다. 그러니까 사흘 정도는..... 에반이 기다려주지 않을까 하고. 지금껏 잘 견뎌준 것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사흘만 참아주면 안 될까. 당장 가진 돈과 앞으로 모을 돈을 계산하는 사이 찬성은 어느새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갑 안의 돈이 어느새 구만오천원으로 줄어 있었다. 


<노찬성과 에반>



이수가 잠시 멈칫했다. 킬로당 구만원이라 할 땐 실감 못했는데 한 접시에 이십오만원이란 얘길 들으니 머리가 띵했다. -내 산낙지 두어 마리 같이 넣어드릴게. 도화는 '어차피 안 살 거면서' 이수가 왜 주저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수가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주세요. 그거.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건너편>


사진 속 두 사람은 등산복 차림이었다. 아버지와 그 여자는 볼을 맞댄 채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뒤로 탁 트인 하늘과 사방이 울긋불긋하게 물든 겹겹의 산봉우리가 보였다. 

'둘이 정상에 올랐나보다......'

조소인지 질투인지 모를 감정이 일었다.

'등산이라니, 참 전형적으로 사신다.'


<풍경의 쓸모>





터닝매카드를 좋아하는 찬성은 아끼는 아프고 늙은 개를 위해 전단지를 이천 장씩 돌려가며 십만원을 마련한다. 그러나 핫바, 핸드폰 가게, 이천원, 만 원, 삼 만원, 사고 싶었던 것들이 아른거려 아프고 늙은 개를 하루만, 이틀만 조금만 하고 병원 가는 일을 밀어둔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었는데, 결국 그 개가 고통스럽게 죽게 하는 일이었다. 

병원에서 말했던 안락사 비용 10만원에서 너무 멀어지자, 찬성은 저도 모르게 전단지 2천장을 다시 어떻게 돌리지, 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버리고 마는 일이 에반이 죽는 것만큼 아팠다. 이 생각은 찬성의 어딘가가 죽는 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한 순간이고, 찬성은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을 뒤로 넘기고 다시 2천장을 돌려야 할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지우고 집에 돌아오는 것. 찬성이의 나이는 이쯤에서 분절했을 것이다. 여기가 마디다.  


또 마음이 아픈 일은 이렇다. 8년 만난 커플이 노량진에서 공무원 수험생으로 처음 만나 여자는 공무원이 되고 남자는 자신의 자리가 될 뻔 했던 자리를 계속 맴돈다. 크리스마스라고, 돈이 생겼다고 남자가 여자의 손을 끌고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는데, 거기서 키로당 9만원하는 돔을 달라고 했다가 한 접시에 25만원이나 써버렸는데, 그 회가 둘이 먹기에는 좀 많았던 거지. 남길 수 밖에 없는 쫄깃한 회를 돈이 아까우니 조금이라도 더 먹어보라고 접시에 회를 놓아준다. 여자는 남자의 차가운 발을 제 손으로 따뜻하게 잡아주고 녹여주었다가 이불 속으로 넣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에 그 비싼 회를 샀으며, 잘 먹지도 못한채 헤어진다. 팽팽하게 찢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너덜 거려서 조금만 힘을 줘도 주욱 하고 찢어지는 소리를 그저 듣는다.


바람이 난 아버지가 있다. '나는 신세는 안진다'라고 늘 말해왔던 사람이 구차하게 나에게 전화를 한다.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뭐야. 암이라도 걸리셨냐고, 냉소하는 내게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거다. 작은 침묵 뒤에 '그 사람이'라고 말을 덧붙여 연민과 화를 한번에 돋구는 일이다. 아버지의 그 사람이 암에 걸려서 아들에게 손을 벌리려 오는 일. 아버지를 어떻게 만나서 핸드폰을 얼핏 보게 되는데 그 핸드폰 바탕화면에 얼굴을 맞댄 아버지와 그 여자의 등산 간 사진을 보는 일. 그게 꽤 행복한 것처럼 보였는데, 당신의 행복이 내게 행복일 수는 없는 일에 표정을 짓는데, 그때 내가 짓는 표정을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감정을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김애란이 적는 고시원은 소설의 서술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 세상에 고시원이 모두 사라졌을 때 복기할 수 있는 고시원의 감정에 대한 사전에 가깝다. 고시원 건물과 학원과 노점들과, 물성은 복원이 가능하겠지만 그 안에서 수험생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의 체험까지 더해야 고시원이다.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것들, 알고 싶지 않는 것들을 낱낱히 밝히는 사전. 이번 책에도 고시원이 나온다. 고시원을 옛적에 떠난 청춘과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가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곳은 고시원을 조금 비켜서 노량진 수산시장이다. 온전히 생선 하나가 뭉텅뭉텅 썰린 접시. 그걸 서로 놔주는 숟가락. 그곳에 너무 많은 얼굴들. 


어떤 기억은 신체가 된다. 그 기억이 살처럼 붙어서 다시 마주하면 아프고, 기쁘고 그런다. 

김애란은 자신의 몸 일부를 적는 것처럼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일대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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